설교요약

역설적인 삶(고후 6:3-10)

마라나타!!! 2010. 8. 21. 01:58

                            <사도바울의 역설적인 삶>(고후 6:3-10)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 나라와 보이는 세상 사이에 끼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 일들을 격게 됩니다. 그 결과 이 세상에서 성도들의 삶은 역설적입니다. 슬퍼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기뻐하고 낙심한 것 같지만 다시 일어납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바울의 고백입니다. 사도바울은 예수그리스도를 전파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사명의 삶을 살았습니다. 여러 가지 환난을 격고 있지만 그러나 역설적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써 이 세상에서의 성공적인 삶의 비결을 배울수가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 다음으로 가장 큰 자유와 기쁨을 누린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이 어렵고 종말의 시대가 되어가도 우리는 내 안에 살고 계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역설적인 승리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삶을 살수가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이 세상에서의 승리의 비결을 배워서 이 어려운 세상에서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할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수 있기를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1. 사도바울은 여러 가지 고난을 격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여러 가지 고난을 격은 것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완전하지 않고 마귀와 죄가 있는 광야 세상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고난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시 90:10)
(1) 환난을 격었습니다.
환난(*, 들립세신)은 육체적, 정신적, 영적으로 압박받는 체험을 말한다.
**환난은 이 세상에서 피할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능히 이기도록 위로를 주십니다.  
(고후 7:4)

**환난을 당함으로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십니다.(고후 1:4-11)

**환난가운데서도 헌금을 열심히 하였습니다.(고후 8:2)

***환난은 세상줄을 끊는 것이요 인내를 가져 옴으로 오히려 기뻐합니다.
(롬 5:3-4)
**욥은 환난가운데서도 낙심 원망하지 안핬습니다.(욥 1:21)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고 하셨습니다.(시 50:15)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을 이셨다고 하셨습니다.(요 16:33)
***환난날에 그의 초막속에 지켜 주신다고 하셨습니다.(시 27:5)
***말세때에는 대 환난이 있다고 하셨습니다.(마 24:9,마 24:21)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가려면 많은 환난을 격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행 14:22)
***화난중에 참으라고 하셨습니다.(롬 12:12)
***주님이 재김하시면 우리는 위로하시고 주님을 따르지 않고 우리를 핍박하는자들을 환난으로 갚아 주신다고 하셨스습니다.(살후 1:6-7)
***요한은 예수그리스도의 나라와 환난과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계 1:9)

***환난에서 이기고 승리한자들이 주님을 찬양하며 주님 얼굴을 뵈옵게 뒬줄로 믿습니다.(계 7:14,렘 33:1-3)
환난때에 낙심하지말고 주님께 부르짖어 기도하고 말씀을 붙잡고 승리할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2) 궁핍은 여러가지가 부족하여 곤난을 격는 상태를 뜻합니다.
궁핍(*,  아낭카이스)은 역경이 끊임없이 닥쳐오는 상황에서 겪는 고통을  말한다(행 20:34).(고후 12:10,빌 4:11-12,
계 2:9,빌 4:19,마 6:33)

(3) 곤난입니다. 곤란(*, 스테노코리아이스)은  좌절을 강요하는 극한 상황을 가리킨다(1:7, 8;4:8). 포위를 당한 상황입니다. 좁은 곳에 있어서 꼼짝 못하는 상황을 말합니다.(롬 8:35,롬 8:38-39)

 

(4) 매맞음과: 재앙, 상처 등을 말합니다.(행 16:22-26,행 16:33,갈 6:17,사 53:5-6)

(5) 갇힘을 당하였습니다.(5438, 퓔라케) 감시, 경계, 감옥

 

(6) 요란한 것 - 이것은 두번째로 분류될 수 있는 것으로서 다른 사람들에 의해 직접적으로 육체에 가해지는 핍박들이다. '매맞음', '갇힘', '요란한 것'은사도행전에 상세히 나타나는데 사실상 그는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다(행 13:50;16:19,22;20:34). 분쟁이 일어나고 폭동 등등 으로 괴롭힘을 당하는 상태입니다. (행 13:50)

 

(7) 수고로움과 (2873, 코포스) 치기, 매질, 고된 일, 수고, 고통.
 교회들에게 짐을 지우지 않기 위해 손으로 힘든 일을 한 것(살전 2:9; 살후 3:8)과 그가 겪은 수많은 고생(고후 6:5; 고후 11:23; 고후 11:27)에 대해 코포스를 사용하여 보다 특별한 의미를 제시한다.(살전 1:3)
수고로운 노동과 힘든 일을 의미합니다.

(8) 자지 못함과-교회와 선교의 일과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하여 염려나 기도하는 일등등으로 인하여 자지 못하였습니다.

(9) 먹지 못함 -(3521, 네스테이아) 금식함 fasting, 금식 fast.

여러분 바울은 이 세상에서 살면서 여러 가지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은 주님의 선교의 일을 감당하기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광야입니다. 여러 가지 위험과 사나운 짐승들이 있습니다. 성도로써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기에 적합한 곳이 아닙니다. 이 세상사는 사람들이라면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여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벧전 4:12-13)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신구약의 모든 신앙의 지도자들은 모두 빠짐없이 고난의 학교를 다녔습니다.
(마 10:28,마 28:20,약 1:2-3,고전 10:13)
사도 바울은 이 모든 것을 견디어 내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쉴곳이 아닙니다. 주님을 바라 보며 우리는 믿음의 길을 가야 할것입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세상 말로 잘 먹고 잘 살다가 가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고난의 발자취를 남겨 주셨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벧전 2:20-21,
히 12:1-3)


여러 가지 이세상의 환난과 궁핍과 고난 가운데서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주님 붙잡고 다시 일어 나고 다시 일어나고 천국 가는 그날 까지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믿음으로 주님만을 바라 보면서 주님께 사랑과 충성을 다할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2. 사도바울은 환난 중에도 믿음의 길을 갔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런 극심한 환난을 격었지만 그의 믿음을 지킨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8가지로 소개 되어 있습니다. 이런 내적인 경건의 연습으로 인하여 사도 바울은 여러 가지 고난을 능히 이겨 낼수 있었습니다.

 

(1) 깨끗함(*, 하그노테티) - 영적인 순결 즉 두 마음을 품지 않는것과 도덕적으로 올바른 행실을 가리킨다(살전 2:10). (54, 하그노테스) 순결 purity, 성실 sincerity.
고난의 길 가운데서 죄악을 타락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거룩한길을 갔습니다.

 

(2) 지식 - (눅 1:77, 눅 11:52, 고후 4:6, 빌 3:8, 벧후 3: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찌어다". 그노시스는 롬 11:33에서 하나님께 속하는 것을 아는 지식이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골 2:3)

 

(3) 오래 참음(*, 마크로뒤미아) - 혹자는 이를 모욕이나 상해(傷害)를  당했을 때 노하거나 보복하지 않고 견뎌내는 것으로 이해한다(Plummer). 또한 혹자는 본절의 '마크로뒤미아'를 4절의 '휘포모네'(*, '견디는 것')와 구별하여 '견디는 것'은 교회 밖의 대적들로부터 오는 시련에 대한 인내를 가리키며,  '오래 참음'은 교회   안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하여   인내하는 자세를  취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본다.

① 갈 5:22에서 오래 참음은 사랑에 의해 지배되는 성령의 열매로서 결국 상호간의 보정(補正)이 된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② 고후 6:6에서 오래 참음은 하나님을 섬기는데 필요한 자질이며 지식과 친절을 연결해 준다: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③ 골 1:11에서 오래 참음은 하나님의 영광에 그 기원을 둔, 그리고 즐거운 감내로 자체를 완성하는 하나의 영적 힘이다: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④ 골 3:12 이하에서 택함받은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들의 새 의복으로서 오래 참음을 입는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⑤ 엡 4:2에서 오래 참음은 그리스도의 한 몸에로의 그들의 소명에 부합한다(참조: 엡 4:1 이하):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⑥ 딤전 1:16에서 그리스도께서 친히 바울을 향하여 오래 참음을 발휘하신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와 같이 하여 그는 대적자들을 대함에 있어서 우리를 위한 하나의 모본을 제공하신다. 아무도 쉽게 포기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오래 참음은 자연적으로 찬양에 이른다(딤전 1:17).

⑨ 약 5:7 이하에서 부당한 고난을 당함에 있어서 마크로뒤미아는 그리스도의 강림을 기다리는 오래참음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그리스도의 가까우심에 대한 인식은 분노의 감정을 끄며 승리적 확고부동함을 낳고 열매의 확실성을 부여한다.

⑩ 히 6:12(참조: 히 6:11-히 6:12)에서 강조점은 믿음과의 관련성에 놓여 있다: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마크로뒤미아는 기다림에 의해 초조해지지 않는 믿음과 소망의 확고부동성이다. 그것의 기초는 의로우신 하나님의 약속이다.

⑪ 벧전 3:20 이하: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명 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여기에서 노아의 시대에 하나님의 오래참음은, 구원과 멸망으로 나타날 순종과 불순종의 진전을 고려에 넣고 있다. 그것은 오늘날 선포와 세례(침례)를 통한 그리스도의 사역에 의해 특색을 이루고 있다.

⑫ 베드로후서에서는 하나님의 마크로뒤미아가 중심 개념이다. 이것은 파류샤(재림)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해 준다(참조: 벧후 3:4). 그것의 목적은 전적으로 적극적인 것, 즉 회개의 기간을 허락해 주는 것이다. 심판은 마침내 악인들 위에 떨어질 것이다(참조: 벧후 3:7).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흠없이 발견되도록 열심을 내야 한다(참조: 벧후 3:14). 그렇지만 우리는 주의 오래참으심을 구원으로 여겨야 한다: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벧후 3:15,약 5:7-8,벧후 3:8-9)

(4) 자비함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레스토테티'(*)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신 결과, 인간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태도로 대하는 것을 말한다(갈 5:22;엡 2:7). 바울은 고전 13:4에서 사랑을 '오래참고 온유하며'라고 묘사했던바 실제로 그 자신이 어려움에 직면하였을 때 다른 사람을 온유하게 대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혹자는 본절의 '자비함'을 '행동에 있어서의 선함'으로 보았던 바(Tasker),이는 성령께서 주신 결과요 하나님의 능력으로부터 유래되는 삶을 변화시키는 증거이다(Martin).
여러 가지 환난을 당하면 사람들이 사나와 지기 쉽습니다. 비방하고 화내며 무시하는 태도를 가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난 가운데서도 온유하게 다른 사람들을 대하여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하실 때 긍휼히 여기십니다. 은혜를 베풀어 주시며 선하게 대하여 주십니다.
여러 가지 고난 가운데서도 다른 사람들을 위한 긍휼과 자비를 버리지 아니하였습니다.

 

(5) 성령의 감화 - 바울이 본절에서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변증적 의미가 있는 것으로서,  고린도 교인들이 문제삼고 있는  그의 인간적 유약함은 바로 성령의 능력 안에서 조화를 이룬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실로 바울의 삶은 성령의 능력으로 점철된  삶이었다(롬 15:18,19).
항상 기도와 말씀으로 주님을 가까이 하고 성령의 감동하심을 잃어 버리지 아니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역경 가운데서 더욱 기도에 힘씀으로 주님께로 가까이 나가고 더욱 깊이 주님을 아응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6) 거짓이 없는 사랑 - 이는  성령의 사역의 최대 열매이다(Bengel).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사랑은 전적으로 위선이 아닌 순수한 것이었다(12:15;고전 8:1).
(고전 13:4-7)
주님의 마음을 품고 주님의 심장으로 모든 사람을 대할 때 사랑으로 대하며 사랑으로 살았습니다.

 

(7) 진리의 말씀 - 복음 곧 화해의 말씀(5:19)에 대한  일반적 표현이다. 바울은 적대자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않고 오직 진리만을 선포하였다(4:2). 바울이 선포하는, 것이 진리라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 안에' 즉 하나님의 능력이 바울의 설교와 행위 속에 현시(現視)됨으로써 증명된다(롬 15:19;고전 1:18;2:4,5).
(시 1:1-3,딤후 3:16-17,엡 6:17,히 4:12)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묵상하며 주시는 능력으로 여러 가지 고난을 이겨 내었던 것입니다.
 
(8)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 바울은 엡  6:16,17에서 그리스도인의 무장으로서, 공격용으로 '성령의 검'과 방어용으로 '믿음의 방패'를 갖출 것을 언급하였다.(엡 6:13-17)
여러 가지 환난과 곤란과 죽을 것 같은 역경 속에서도 사도바울은 낙심 포기 원망하거나 죄 가운데 빠지지 아니하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 보았습니다.

항상 기도와 말씀으로 강한 믿음으로 무장하며 죄와 싸우고 마귀를 물리치며 믿음의 길을 달려 갔던 것입니다.

 

여러 가지 고난 가운데서도 낙심말고 신앙 생활을 주님께 더욱 깊게 나가는 기회로 삼으시기를 축원합니다.

환난가운데서 죄에 빠지지 마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며 사랑으로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그의 능력과 말씀위에 굳게 서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을 바라보며 의지하며 주님 닮아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십자가를 참으신 주님, 죽기까지 복종하시고 승리하신 주님을 의지하여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사 40:27-31,딤후 4:7-9,고전 15:58)

 

만약에 요셉이 노예로 팔려가고 감옥 갇히는 역경속에서 믿음과 꿈을 버리고 죄악에 빠지며 원망 하고 포기해 버렸다면 국무총리가 되 못하였을 것입니다.
고난의 때에 더욱 힘써 믿음을 지키고 달려 갈길을 가는 우리모두가 될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3. 그결과 사도 바울은 이 세상에서 역설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 나라 백성이지만 이 세상에 슬픔많고 죄 많고 마귀들이 득실거리는 이 문제 많은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천군 천사가 함께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성도들의 삶은 사도 바울 뿐 만 아니라 역설적인 삶입니다.

(1)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 바울은 그의 사도 직무를 수행하면서  존경을 받을 때도 있었으나(갈 4:14) 오해와 비방을 받을 때도 많았다(10:10;11:23-33;고전 4:10;빌  1:15-18;살후 2:2). 바울은 이러한 현상을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의아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기에 어떠한 난관에 부딪쳐도 결코 좌절하지 않고 그의 직책(5:18)을 묵묵히 수행할 수 있었다. (고후 10:10)
주님을 보지 못한 자가 어떻게 사도가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를 핍박한자가 어떻게 사도가 될수 있는가?
몸이 그렇게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은 자가 어떻게 사도가 될수 있는가?
등등의 비방과 오해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개의치 아니하고 주님 앞에서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며 갈길을 갔던 것입니다.(고전 4:1-4)

 

(2)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 본문은 '비난을 받거나  칭찬을 받거나'(공동번역)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사역자는 뒤에서 비방(誹謗)하는 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실하고 사랑하는 태도로 일관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좋은 평가를 받고  싶은 유혹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유혹은 결국 교만과 자기 만족으로 이끌 뿐이므로 단호히 물리쳐야 한다. 바울은 본절을 통해서 '악한 평판이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결코 그를 해칠 수 없고, 좋은 평판이 참되다 할지라도 결코 그를 비뚤어지게 할수 없다'는 결연한 자세를 나타내고 있다.

 

(3)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  예수께서도 생전에 미혹하게 하는 자라는 비난을  받았었다(마 27:63;요 7:12). 바울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이야기했을 때, 그의 대적들은 그를 가리켜 거짓말을 한다고  비난했고(고전 15:15),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속임수라는 비난을 하였다(12:16-18). 그러나  바울은 자기가  결코 거짓말하는  자가 아님을  하나님 앞에서  강력하게 증거한다(4:2;5:11;11:31).

 

(4)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 '무명한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그노우메노이'(*)는 '무시당하다.'에서 파생된 말로 바울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여기서 바울이 무시당했다는  것은 아마 그의 사도직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고전 9:1;15:8, 9). 고린도 교회에는 바울을  대적하는 자들이 바울의 사도직을 부인하면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반(反)하는  자기들의 견해를 주입시키려 하였던 상황이 전개되었었다(10-13장). 그리고 사실상 바울은, 열 한  사도들처럼 생전의 예수와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한 외부적 조건을 갖추지는 못하였으나  모든 사도직의 유일한 근원인  하나님으로부터의 사도직은
부여받았다(갈 1:1, 12, 16).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의 중심  사도로부터도 인정받았고 (갈 2:7, 9), 고린도 교인들에게도 인정받았음이 틀림없다(5:11). 

(5) 죽는 자 같으나...살고 - 본절은 바울의 역설적인 표현으로 실제적인 의미와 신학적인 의미를 동시에 함축하고 있다. 실제적으로 바울은 죽음의 위협을 여러 번 겪었고(행 14:19;고전 15:30) 거의 죽게 된 상황에까지 이르렀었다(1:8, 9). 또한 그는  예수의 죽음을 그의 몸에  짊어지고 다녔다(4:10-12). 여기에는 자기 안에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신학적 의미가 있다(5:14, 15;롬 6:1-14;갈 2:20).
본절에서 바울은 그 자신이 복음을 위해서 하나님께  헌신(獻身)된 도구가 되었음을 고린도 교인들에게 주지시키고 있다(Martin).
(고후 5:14-15,고후 6:14,갈 2:20,
고후 4:7-10)

 

(14)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 구약성경에서 여호와의 징계는  아들을 바로 세우기 위한 아버지의 행동에 비유되는 바, 자기  백성에 대한 사랑과 관심의 증거로 이해되었다(욥 5:17;시 94:12;119:67;잠 3:11, 12;렘 31:18, 19등). 본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을 그와  같이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바울의 적대자들은 바울이 여러 가지 고통과 시련을 당하는 것은 그가 과거에 바리새인으로서 교회를 심히 핍박했기 때문이라고 비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바울은 그의 고난이 하나님의 진노의 표시가 아니라 바로 세우기 위한 사랑의 표시임을 인식하였고  실제의 삶에서 이를 체험하였다(1:9;4:11;고전 11:32).

 

(6)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 적대자들의 사도 시비, 그것에  의해 흔들렸던 일부의 고린도 교인들, 그리고 전체적인 이스라엘의 불신앙  등은 바울을 슬프게 하는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늘 기뻐하였고(2:3;7:4;롬 12:12;고전 16:17) 그의 성도들에게도 그리하도록 가르쳤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적인 특징이다(Barrett). (빌 4:4,살전 5:16-18)

우리 자신을 바라 볼 때 한심한 생각도 슬픈 생각도 듭니다.
이 세상에서 고생하는 인간들을 볼 때 불쌍하고 긍휼의 마음을 주십니다.
또 세상을 바리 볼 때 정말로 심판 아래 있는 것을 생각하면 안타깝고 슬퍼 집니다.
그러나 이 슬픔 많은 이 세상에도 우리는 주님 안에서 얼마든 기뻐할 수가 있습니다.
(롬 14:17)
 
(7)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 바울은 세상의 부(富)를 거의 갖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경제적인 가난의 상태를 언급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그가 고린도 교인들의 영육이 부해지도록 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교회의 보수받기를 피했지만(5절;11:7-10;고전 9:12, 15, 18), 그가 여기서 언급하는 것은 영적인 의미의 가난이다(Collange). 그렇다면 바울은 어떻게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하였는가 ?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고귀한 지식 때문에 스스로 자신을 부요한 자라고  생각하였다(빌3:8). 바울이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물질적인 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이루어졌다. 하나님의 아들이신예수는  인간의 부요함을 위해서 스스로 가난한 자가 되셨다(8:9).
(마 6:19-21,눅 12:20-21,딤전 6:17-19)
우리는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 나라에 재물을 쌓아 놓아야 합니다.
헌금도 하고 나가서 전도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빌 4:1,딤후 4:8,고전 9:25,벧전 5:4,마 25:21)

 

(8)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 바울이 '아무것도 없는 자'라고 했을 때, 그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세상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관한한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런 것은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이 세대'가 진행되는 동안만 쓸모 있고, 다가오는 '새로운 세대'에는 전혀 가치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얻었고 '새로운 세대'를 얻었으므로 사실은 모든 것을 소유한 자였다(고전 3:21, 22). 다른
****하나는,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없는 자'는 그리스도께 속한 자(고전 3:23)라는 의미이다.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속한 자는 본질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 즉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섬기기 때문에 오직 주 예수께서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심을 믿고 살아간다(Barrett). 한편 본절의 내용은 영적인 것에 자신의 모든 사고와 행동의 초점을 맞춘 철저한 그리스도의 종으로서의 바울 사도의 자화상(自畵像)을 보여준다. 바울은 실로 소유와 무소유, 삶과 죽음에 전혀 구애받지 않았던 하나님의 신실한 사역자였다.
주님이 자신의 삶의 모든 면을 주관하신다는 믿음입니다.
이 세상에서 성도의 삶은 역설적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나의 삶의 주인이시며 나의 필요한 것은 모두 주님께서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주님만 소유하면 되는 것입니다.

(9) 성도들은 베풀어 줌으로써 후히 되는 역설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눅 6:38,눅 9:46-47,눅 14:11,벧전 5:5-6,마 11:28-29)빌 2:5)

(10) 우리 성도들은 약할 때  강하여 집니다.(고후 12:10)

마귀는 복음을 전하는 사도바울을 지속적으로 괴롭하고 방해하고 죽이려고하고 하였지만 바울을 막지 못하였습니다. 그 당시 로마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복음을 전하고 교회들을 세웠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삶은 역설적인 삶이 었습니다. 죽는 자 같으나 살고 근심하는 자 같지만 기뻐할수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없었지만 모든 것을 가진 자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상의 방법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한 주님에 의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빌 4:13)

대 환난의 때가 닥쳐 오고 지금 보다 더 어려운 세상이 온다고 해도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명의 길을 포기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원망이나 낙심이나 죄악에 빠지지 마시기를 축원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우리를 죽이려고 해도 죽이지 못합니다.
세상에 눌리지 마시기를 축원합니다.
믿음으로 주님으로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그리스도로 오히려 승리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는 우리 모두가 될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이미 승리자 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의 고백이 우리들의 고백과 신앙이 될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는 지금 세상에 눌려서 세상 염려, 근심, 궁핍 곤란, 핍박에 눌려 있지는 않습니까?

사도바울은 여러 가지 곤난을 당하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격는 여러 가지 고난은 우리 성도들에게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 만큼, 사도 바울만큼 고난을 당한 사람은 없습니다.
낙심원망 죄악에 빠지지 마시기를 축원합니다.
고난을 끝까지 참고 이겨 내신 주님을 바라 보시기를 축원합니다.

나는 지금 믿음의 길을 져버리고 세상으로 나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도 바울은 환난 가운데서 자신을 지켜 거룩한 삶을 살았고 말씀을 붙잡고 영적인 싸움을 싸웠습니다.
말씀과 기도로 주님께 더욱 가까이 나가는 계기로 삼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선한 싸움을 싸우고 믿음을 지키고 달려갈길을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도바울은 역설적인 삶을 살수 있었습니다.
근 심하는 자 같으나 기뻐하였고
비방받고 오해 받았어도 주님 앞에서 자신의 길을 갔습니다.
칭찬 받고 높임을 받을 때도 있었지만 주님께 모든 영광을 돌려 드렸습니다.
죽은 자 같으나 살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 살았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소유할 때 우리도 그런 역설적인 삶을 살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 때 역설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내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의지할 때 역설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나의 모든 것이 되실 때 우리는 얼마든지 승리하고 세상을 이기며 사명 감당할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어디서든지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의 이름을 높이며 찬양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을 전파하며 주님 위해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이미 승리자입니다.
내 안에 계신 주님이 세상 보다 크시기 때문이며 이미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환난 많은 이 세상 슬픔많은 이세상, 죄 많은 이 세상에서 낙심 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주님을 붙잡고 달려감으로 역설적인 승리의 삶을 사는 복된 우리 모두가 될수 있기를 우리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