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7:14-23, 바른) [14] 예수께서 다시 무리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모두는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15] 무엇이든지 사람 밖에서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그를 더럽게 할 수 없고, 다만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들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들이다." [16] (없음) / 다른 고대 사본에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어라'가 있음. [17]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 집으로 들어가실 때, 제자들이 그 비유에 관하여 물었다. [18]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이렇게도 깨달음이 없느냐?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를 더럽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19] 그것이 그의 마음에 들어가지 않고 배에 들어갔다가 뒷간으로 배설되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라고 하심으로 예수께서는 모든 음식을 깨끗하다고 하셨다. [20] 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21]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악한 생각들이 나오는데, 곧 음행, 도둑질, 살인, [22] 간음, 탐욕, 악독, 속임수, 방탕, 악한 눈, 비방, 교만, 어리석음이다. [23] 이 모든 악한 것들은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힌다."
(막 7:14-23, NKJV) [14] When He had called all the multitude to Himself, He said to them, "Hear Me, everyone, and understand: [15] "There is nothing that enters a man from outside which can defile him; but the things which come out of him, those are the things that defile a man. [16] "If anyone has ears to hear, let him hear!" [17] When He had entered a house away from the crowd, His disciples asked Him concerning the parable. [18] So He said to them, "Are you thus without understanding also? Do you not perceive that whatever enters a man from outside cannot defile him, [19] "because it does not enter his heart but his stomach, and is eliminated, thus purifying all foods?" [20] And He said, "What comes out of a man, that defiles a man. [21] "For from within, out of the heart of men, proceed evil thoughts, adulteries, fornications, murders, [22] "thefts, covetousness, wickedness, deceit, lewdness, an evil eye, blasphemy, pride, foolishness. [23] "All these evil things come from within and defile a man."
1. 타락한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들이 사람을 더럽힌다.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악한 생각들이 나오는데, 곧 음행, 도둑질, 살인, [22] 간음, 탐욕, 악독, 속임수, 방탕, 악한 눈, 비방, 교만, 어리석음이다.
명사 포르네이아는 70인역본에서 히브리어 타즈누트, 제누트, 제느님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간음, 사통'을 나타낸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포르네이아는 신약성경에서 25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포르네이아는 일반적으로 부정한 성교에 대해 사용되었다. 행 15:20; 행 15:29; 행 21:25에서 사도 회의는 이방인 신자들이 피해야할 네가지 규정을 명하는데 그 중에 하나가 '간음'이다(고전 6:13 이하를 보면 이교도 중에서 개종한 자들이 이 악덕[간음]을 얼마나 관대히 여겼으며, 그들이 그 죄에 얼마나 가볍게 빠졌는가를 알 수 있다). 또한 롬 1:29Rec.; 고전 5:1; 고전 6:13; 고전 6:18; 고전 7:2; 고후 12:21; 엡 5:3; 골 3:5; 살전 4:3; 계 9:21; 마 15:19; 막 7:21; 갈 5:19에 이 단어가 나온다.
이 단어는 간통에 대해 사용되었다(참조: 호 2:2). 마 5:32; 마 19:9에서 포르네이아가 단순히 모이케이아(moiceiva, 3430)의 의미에서 혼외 성교로써 이해해야 하는지 혹은 간음(prostitution)으로 이해해야 하는지는 완전히 분명하지 않다. 어떤 주석가들은 이혼의 사유가 될 수 있는 것은 결혼 생활 중에 여자 생활이 매춘부였다는 것이 드러나게 되었을 때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포르네이아는 모이케이아와 동의어로서 간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b) 여호와와 그의 백성 사이에 존재하는 밀접한 관계를 "결혼"에 비유하여 묘사하는 구약성경과 유대인의 일반적인 어법 형태에 따라 포르네이아가 은유적으로 우상 숭배에 대해 사용되었다: 계 14:8; 계 17:2; 계 17:4; 계 18:3; 계 19:2.
우리는 우상 숭배에 빠진 백성에게서 나지 않았다. "우리가 음란한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 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리로다", 요 8:41.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음으로써 초래되는 바와 같은, 우상 숭배로 인한 더럽힘에 대해 사용되었다(계 2:21).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H. Reisser).
(2) klophv(2829, 클로페)
도적질 theft.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클로페(Aeschyl 이래)는 클렙토(klevptw, 2813: 도둑질하다, 훔치다)에서 유래했으며, '도둑질'을 의미한다.
2.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클로페는 신약성경에서 2회 나오며 마 15:19; 병행구, 막 7:21에만 사용되었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명사 포노스는 70인역본에서 약 25회 나오며, 히브리어 담(1818: 피, 피흘림, 출 22:2; 신 22:8; 잠 1:18; 잠 28:17), 헤레브(2719: 칼, 출 5:3; 레 26:7; 신 28:22), 페케르(6297: 시체, 겔 43:7; 겔 43:9), 페(6310: 칼[날], 출 17:13; 민 21:24; 신 13:15; 신 20:13), 라차흐(7523: 살인하다, 호 4:2)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살인이나 살해' 및 그것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포노스는 신약성경에서 9회 나오며, '살인'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a) 살인자 바라바에 대해 사용되었다: "민란을 꾸미고 이 민란에 살인하고 포박된 자 중에 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막 15:7; 병행구 눅 23:19; 눅 23:25).
(b) 구약 성도에 대한 박해와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히 11:37).
(c) 바울이 열거한 악덕 목록에 나온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롬 1:29). 바울은 인간의 잘못된 행위를 폭넓게 열거하면서 인간을 그의 이기심에 내버려 두신 결과가 어떠한지를 드러내 보인다. 모든 인간 관계의 온 영역이 독소로 오염되었다.
(d) 무서운 재앙에도 회개하지 않은 자에 관해 사용되었다: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적질을 회개치 아니하더라"(계 9:21). 멸망의 영들은 마귀의 세력을 풀어놓는다. 그 앞에서 어떤 자도 도망갈 수가 없다. 이것은 로마 제국에 대항하여 동방에서 진격해 오는 바데 군대(마병, 유브라데)를 암시한다. 또한 이 무서운 재앙은 회개의 촉구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계 9:20).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하고 있다(21절에 대해서는 출 20:13-15 참조. 마술, 행 19:19; 신 18:10 참조). (KRV Study Bible).
(e)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의 하나로 언급되었다.
(f) 행 9:1에서 '살인'의 숨결(기)을 나타낸다: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명사 모이케이아는 70인역본 구약성경에서 3회 나오며, 히브리어 나아프(간음하다)의 변형들의 역어로 나타난다(호 2:4; 호 4:2; 렘 13:27).
→ moiceuvw, 3431 모이큐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모이케이아는 신약성경에서 4회 나오며, '간음'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마 15:19; 막 7:22; 요 8:3; 막 7:21(TR); 갈 5:19(TR).
→ moiceuvw, 3431 모이큐오.
(참조: J.H.Thayer; H.Reisser).
(5) pleonexiva(4124, 플레오넥시아)
탐심, 탐욕, 탐욕스러움.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플레오넥시아는 플레오네크테스(pleonevkth", 4123: 더 많이 가지기를 원하는 사람)에서 유래했으며,
(a) 더 많이 가지려는 '탐욕스러운 욕망, 탐심, 탐욕, 탐욕스러움'을 의미한다(Hdt., Thu.).
(b) 플레오넥시아는 '부도덕한 권력'에 대해 사용되었으며(Hdt. 7, 149), 투키데스의 작품에서는 '야망' ambition이라는 뜻의 휠로티미아(Philotimia)와 함께 인간의 행동과 역사의 본질에 있어서의 결정적 힘을 의미했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플레오넥시아는 70인역본에서 8회 나오며, 히브리어 베차(1215: 폭력에 의한 취득, 불의한 취득)의 역어로 돈을 '탈취하는 것'(삿 5:19), '불의의 이득'(합 2:9; 겔 22:27), '탐욕, 탐람'(시 119:36; 렘 22:17)을 나타낸다.
마카베오이서 4:50에서 플레오넥시아는 뇌물로 얻는 소득을 탐하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이처럼 이 단어의 강조점은 탐욕의 불경한 성격 그리고 전적으로 악한 성격에 놓여 있다. 이러한 이유로 시 119편에서 기도하고 있는 사람은 플레오넥시아로부터 지켜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70인역본에서 36절).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플레오넥시아는 신약성경에서 10회 나오며, '탐심, 탐욕, 탐냄, 탐욕스러움'을 의미한다.
(a) 악덕 목록에서 플레오넥시아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롬 1:29), 믿음과 순종(엡 5:3)이 없는 삶 및 부도덕한 삶(막 7:22)의 표시로 제시된다. 피조물과 창조주 사이의 유대가 끊어질 때 인간 사회는 와해되어 버리고 만다. 더 이상 자기의 목표와 만족을 하나님께 두고 있지 않은 사람은 자기 자신, 자신의 소유, 취득 능력에서 만족을 구한다. 결국 그는 자기 자신을, 모든 것을 자기에게 복종시키려고 애쓰는 하나의 우상으로 변모시킨다. 이러한 이유로 골 3:5은 탐욕을 우상 숭배와 동일시하고 있다.
골 3:5은 독자들에게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라고 명령하고 있다. 이것은 마 5:29 이하를 생각나게 하는데, 죄에 예속된 육적인 본능은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능력, 즉 새로운 영적 생활을 변화시키고 해방하는 능력을 통하여 이 새로운 생활의 지배 아래 들어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b) 눅 12:15에서 모든 탐심에 대해 경고하신다: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c) 고후 9:5에서 플레오넥시아는 탐욕에서 억지로 잡아 뗀 예물(gift)이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d) 살전 2:5에서 '탐욕의 구실(탈)'을 묘사한다: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거하시느니라".
(e) 엡 4:19에서 돈이나 성욕이나 항상 자기 몫보다 더 많이 차지하려는 욕망을 표현한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f) 베드로후서에 따르면 거짓 교사들은 물질적인 이득을 탐하는 데에 그 특징이 있다(벧후 2:3; 벧후 2:14).
① 벧후 2:3,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를 삼으니 저희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저희 멸망은 자지 아니하느니라".
② 벧후 2:14,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쉬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
(e) 고전 5:8에서 포네리아는 '고집과 즐거움으로 악을 행함'을 나타낸다: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f) 엡 6:12에서 소유격 포네리아스는 영적 세력들을 나타낸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필립스(Phillips)는 타 프뉴마티카 테스 포네리아스 '바로 그 악의 본부에서 파견된 영적 앞잡이들'이라고 하였다.
구약성경으로부터의 실제의 인용문 외에도, 구약성경 특히 금언서(예를 들면 시 10:7; 시 36:4; 시 52:4; 시 55:11; 잠 12:5; 잠 12:20; 잠 16:28; 잠 26:4; 지혜서 1:5; 지혜서 4:11; 지혜서 14:25; 집회서 1:30; 집회서 19:26; 참조, 렘 5:27; 렘 9:5; 습 1:9)에서 흔히 불경한 사람을 "기만적"이라고 묘사하는 것(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의롭다" 하는 것과 대조적으로)은 분명하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돌로스는 신약성경에서 11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예수님을 붙잡아 죽이려는 그의 적대자들의 의도는 그것이 엔돌로로 행해질 것이라는 말과 함께 명백히 부정적으로 묘사된다(막 14:1; 마 26:4, 돌로). 주어진 이유(백성들에 대한 두려움) 외에 이 이야기는 장차의 예수님의 수난은 죄 없이 유죄 판결을 받은 의로운 사람의 수난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의 적대자들의 바람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의 불 경건한 행위로 이해된다.
(b) 행 13:8 이하에서 마법사 엘루마의 반종교적인 행위, "모든 궤계"가 한 사람의 행위로 묘사되는 것과 대조적으로, 처음에 제자로 부름 받은 자들 중에서 나다나엘의 행위는 "참 이스라엘 사람", "그 속에 간사함이 없는" 행위이다(요 1:47). 참으로 "의로운" 자를 묘사한 구약성경의 구절들(참조, 시 32:2; 습 3:13)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는 성격 묘사이다(참조, 계 14:5).
(c) 신약 성경의 악덕의 목록(Vogtle 1; Wibbing 78)에서 돌로스가 막 7:22; 롬 1:29; 벧전 2:1에만 나타난다. 바울은 "경건하지 않은" 그리고 "불의한" 삶을 사는 자들의 성격을 돌로스로 묘사하여 구약성경을 따른다(참조, Vogtle 229-32).
(d) 막 7:22에서 돌로스는 예수님의 말씀에 '악' 즉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사람이 개인적으로 책임이 있는 죄를 구성하는 여섯 악의 두 번째 시리즈의 첫 머리에 나온다.
이것과 대조되는 일반적인 용법이 벧전 2:1의 교회에서의 구체적인 봉사에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을 버리라는 명령에 사용된다. 돌로스는 특히 개인들간의 관계를 흐리게 하고 "거룩한 제사장"으로서(벧전 2:5), "택하신 족속"(벧전 2:9)으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함께 하는 교회 생활을 방해하는 행위의 특징의 하나이다.
(e) 죄 없으신 하나님의 종의 수난(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여)은 벧전 2:22에 "강포를 행치 아니하시고" 그의 입에 "궤사도 없으신" 자의 고난으로 묘사된다. 그 인용문은 그리스도에 대한 전통적인 찬양(벧전 2:21-25)을 구성하는데 그 찬양은 가족 규례에 대한 가부장적인 문맥에 인용된다: 종들은 그들 자신을 예수님께서 "본을 보이신" 고난을 따름으로 증명해야 한다(벧전 2:21).
시 34:13-17과 함께 벧전 3:10-12은 삽입구에서 "너희가 다"(벧전 3:8)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에 기초한 삶에 목적을 둘 것을 권고함으로 끝을 맺는데, 그러한 삶은 악에 대하여 "축복"으로 응답(벧전 3:10)하지 않고 서로 보복하는 악한 무리에 의해 파괴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그의 입술이 "궤휼을 말하는 것"을 삼가는 것을 의미한다.
(f) 이미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바울은 그의 전도 사역을 변호한다: 그의 선포는 "궤계"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살전 2:3). 바울은 자기 자신을 특히 고린도후서에서 변호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변경하는(혼잡케 하는) 사람에 속하지 않는다(고후 4:2). 이것은 "다른 예수"와 "다른 복음"을 설교하는(고후 11:4) "거짓 사도들", "궤휼의 역군"(고후 11:13)의 특징이다. 바울이 고린도인들 앞에서, 모든 것이 그들을 위해서 한 것이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가 궤계로 얻었다는 그의 "특권"에 대해 변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얼마나 불합리하게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다(L. Oberlinner).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8) ajsevlgeia(766, 아셀게이아)
방탕, 방종, 호색.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아셀게이아(Pla., Polyb., Plut. 등)는 '방탕, 방종, 도락, 호색'을 의미하며, 육체적, 영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2.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아셀게이아는 신약성경에서 10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아셀게이아는 '방탕, 도락, 방종'에 대해 사용되었다.
① 벧후 2:7에서 소돔과 고모라,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② 엡 4:19에서 이방 세상,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③ 막 7:22,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b) 아셀게이아는 '성적 도착'에 대해 사용되었다.
① 롬 13: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② 고후 12:21, "또 내가 다시 갈 때에 내 하나님이 나를 너희 앞에서 낮추실까 두려워하고 또 내가 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의 그 행한바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치 아니함을 인하여 근심할까 두려워하노라".
③ 갈 5:19,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④ 벧후 2:2, "여럿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니 이로 인하여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을 것이요".
⑤ 벧후 2:18, "저희가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여 미혹한데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여".
⑥ 유 1:4,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O. Bauernfeini).
(9) ponhrov"(4190, 포네로스)
나쁜 상태에 있는, 병든, 나쁜, 악한, 사악한.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형용사 포네로스(Hes., Thu. 이래)는 포네오(수고하다)에서 유래했으며, 카코스(kakov", 2556)와 카키아(kakiva, 2549) 및 그 파생어들의 동의어로 사용된다.
포네로스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a) '슬픈, 불행한, 근심으로 괴로워하는'.
(b) '괴롭게하고 슬픔을 초래하는 것, 재난이나 재앙을 가져오는 것'(이런 불행을 가져오는 병에 대해 사용되었다)
형용사 포네로스는 70인역본에서 약 300회 이상 나오며, 대부분 히브리어 라아(악한, 나쁜, 무가치한, 무용한)를 번역하였으며, 동물, 음식, 땅, 인격체에 대해 사용되었다.
동물들에 대해 사용될 경우에는 '위험한, 해로운'(창 37:20)을, 또 인격체의 명예에 손상을 준다는 의미로(예: 신 22:14), 인간의 심령과 관련하여 '악한'이라는 의미로(예: 삼상 16:14이하), 느 2:2에서는 슬픈 기색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포네로스가 윤리적 측면에서는 인격체이든(창 13:13; 사 9:17[16]; 집회서 25:25), 사물이든(사 3:9), '악한, 나쁜, 가치없는, 부패한, 타락한'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카코스처럼, 포네로스 역시 도덕적 의미 뿐만 아니라 종교적 의미까지도 함축하고 있다. 이런 경우에는 하나님과의 분리, 하나님과 그의 뜻에 반대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암 5:14이하).
신약성경과는 대조적으로, 이 단어는 악마를 뜻하는 말로서는 사용되지 않는다. "선악"이라는 표현(창 3:5, 창 3:22)에서는 포네로스가 사용되었는데, 이 선악은 가장 넓은 의미로 볼 때, '모든 것'을 의미한다.
3. 신약성경의 용법
형용사 포네로스는 신약성경에서 78회 나오며,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1. 포네로스의 '나쁜, 해로운, 쓸모없는, 무익한'이란 의미에서,
(a) 포네로스는 '나쁜, 해로운'이란 의미를 나타낸다.
계 16:2에서 포네로스는 '독'종을 묘사한다: "첫째가 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으며 악하고 [독한] 헌데가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나더라".
엡 5:16에서 때가 악한 것(포네로스)은 때가 나쁘다는 것이다. 즉 시간과 기회를 잘못 사용하도록 인도하려는 압박이나 많은 장애가 있어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생활에서 해이해져서는 안되며 언제나 그러한 압박이나 장애를 극복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엡 6:13에서도 유사한 표현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여기서 "악한 날"은 악한, 위험한, 위기의 날, 고통과 위난의 날이며, 따라서 치명적이며 파멸을 가져오는 날이기도 하다. 이 때는 대외적인 핍박과 기독교인의 교제 안에서 일어나는 대내적인 시험으로 말미암아 투쟁이 가장 극심해질 때, 죽음의 날, 심판의 날이며, 마귀가 특별히 세력을 발휘할 때이다.
복음서에 나타난 계시적인 구절과(참조: 막 13:4-23) 바울 서신의 몇 구절은(참조: 살후 2:3) "주님의 날"이 이르기 전에 투쟁의 속도가 빨라지고 전쟁의 극렬함이 증가하며 점차 가속화된다는 사실을 비슷하게 언급하고 있다(참조: 요일 2:18-19).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악한 날"이 이르기 이전에 준비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이루어져야 할 많은 일들이 있으며, 또한 봉사할 수 있는 많은 기회도 있다. 그러나 바울은 위대한 일 심지어는 사도의 직분을 감당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지막 날에 가서는 버림받은 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참조: 9:24-9:27). 그래서 그는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즉 모든 위대한 일을 수행한 후에 "서야 한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가장 강조적인 어법으로 강조하고 있다(참조: F.Foulkes; F.Hauck; S.Schulz).
갈 1:4에서 현재의 긴 시대를 악한 시대라고 하는데, 이는 고통과 시험으로 가득찬 시대이기 때문이다.
(b) 마 7:18에서 포네로스는 구약성경에서와 같이 '쓸모없는, 무익한' 열매를 의미한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마 18:32; 마 25:26; 눅 19:22에서 "악한 종"은 비난 받아 마땅한 '무익한' 종이다.
2. 포네로스의 도덕적 의미.
(a) 포네로스의 형용사적 용법.
① 사람에 대해 사용되는 경우, 인간들은 도덕적으로 악하다(마 7:11). 인간과 대조적으로 하나님만이 홀로 선하시다(막 10:18).
바리새인들은 마음이 완악하다는 의미에서 악했다(마 12:34). 그들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말들을 낸다(마 12:35). 유대인들도 마찬가지로 악한 세대였다. 그들은 말씀과의 만남이 개방되었는데도 메시야적 표적을 구하는 악한 세대이다(마 12:39; 마 16:4; 눅 11:29). 이 두 부류는 예수님을 대적함으로써 그들의 성향을 나타내 보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는 누구든지 악하다.
딤후 3:13에서 악한 자들은 처음에는 예수님과 그의 메시지에 대해, 그 다음에 살후 3:2에서 악한 자들은 믿는 자들과 그들의 신앙을 반대하는 자들이다.
행 17:5에서는 포네로스가 사회적 치욕인 어떤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괴악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케 하여 야손의 집에 달려들어 저희를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② 사물에 대해 사용되는 경우, 눅 6:22에서 포네로스는 '도덕적으로 나쁜 비난 받아야 할'이란 의미를 나타낸다: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제자들의 이름은 '도덕적으로 나쁜', 또는 '비난받을만한' 것으로 멸시를 받고, 거절을 당했다. 어떤 경우에도 포네로스는 개인 제자들의 이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막 7:22; 마 20:15에서 '흘기는' 눈은 시기로 가득찬 탐욕적인 눈을 의미한다. 그것은 역시 "사악한" 눈초리를 의미할 수도 있다.
마 6:23; 눅 11:34에서 포네로스는 '사악한'이나 '병든'을 의미할 수 있다. 왜냐하면 구약과 신약성경은 마음과 눈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고, 악한 눈 혹은 탐욕스러운 눈이라는 생각은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마 15:19에서 악한 생각들은 내부로부터 온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참조: 막 7:21).
약 2:4에서는 명성이나 돈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기본적인 동기를 악하다고 말한다.
딤전 6:4에서 교묘하게 환심을 사는 것이나 악한 의심이라는 뜻을 나타낸다.
히 3:12에서 내적 인격은 악하다. 왜냐하면 자기 뜻대로 배교(背敎)하기 때문이다(히 10:22에서는 나쁜 양심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다고 한다). 말들과 행동들이 악할 수 있다(약 4:16의 오만, 골 1:21의 그리스도를 믿기 전의 행위, 또는 딤후 4:18에서 하나님의 말씀 전파자들에게 행하였던 일들 등이다).
요 3:19에서 빛과 어둠의 대립은 포네로스(참조: 요 3:20-요 3:21)의 내용을 결정한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요 7:7에서 세상의 일들은 악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런 일들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복음을 거스리는 모든 것들은 다 사악한 것이다. 이것은 잘못이며, 그 보급, 그것에 묶여 있는 전체 성향을 포함하며(요이 1:11), 싸우는 대적자들의 말들을 포함한다(요삼 1:10), 악한 일의 결과는 하나님의 구원에서 제외되는 것이다. 이 이유 때문에 가인의 일은 악한 것이다(요일 3:12).
행 18:14에서 갈리오가 이 말을 했을 때에는 법에 의해 처벌될 수 있는 법률적인 잘못이라는 보다 세속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다.
신약성경에서는 자주 악한 영이라고 표현된다(마 12:45; 눅 11:26). 예수님과 사도들은 이런 의미들을 자유스럽게 사용한다(눅 7:21; 눅 8:2; 행 19:22).
(b) 포네로스의 명사적 용법.
① '나쁜 사람'. 많은 사람들이 마 22:10의 "악한 자"를 사회적인 의미, 곧 누더기를 걸친 자로 해석하고자 했으나, 이 귀절에서도 역시 신앙적으로 악한 사람을 뜻한다. 예복을 입지 않은 그 사람의 경우와 마찬가지다(마 22:11). 사실상 그 사람(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복음을 거절해온 사람인 것이다.
마 5:39 상반절의 말씀도 다른 영역본(RSV와 NEB)처럼 악한 자로 해석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구절의 하반절을 보아서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마 13:49이하에서는 마지막 심판 날 하나님께서 포네로이(복수)를 갈라내어 형벌에 처하실 것을 선언하고 있다(참조: 마 22:13이하).
교회는 악한 사람을 축출해야 한다(고전 5:13).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은 악한 자들이 지상에 사는 동안 그들에게도 임하므로 기독교인들은 그들에게 사랑을 보여 주어야 한다(눅 6:35).
② '마귀'. 마 13:19에서 호 포네로스는 절대적 의미에서 '악한 자'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 병행구인 막 4:15에서는 '사탄'이라 하였고, 눅 8:12에서는 '마귀'라고 지칭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 17:15; 엡 6:16; 살후 3:3(RSVmg,NEB) 등도 마찬가지이다. 요한일서에서는 이 단어가 자주 눈에 띤다(참조: 요일 2:13, 요일 2:14; 요일 3:12; 요일 5:18, 요일 5:19). 마 13:38의 투 포네루를 남성(즉, 악한 자)으로 해석해야 될지 아니면 중성(즉, 악)으로 해석해야 될지에 대해서는 아직 토론의 여지가 있다. 하더(G.Harder)는 후자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이 주장도 전혀 불확실한 것인데, 이는 마 13:39에서 그 악의 근원을 마귀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마 13:38의 악에 대하여 어떤 약화된 의미를 부여할 수 없게 한다. 신학사적으로 볼 때, 악의 인격화를 피하고자 하는 노력이 결국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비인격화를 초래하였다.
마 6:13에서 "다만 악에서 구원하소서"라는 문구는 번역자들과 해석자들 사이에 의견을 달리한다. 이 단어에 붙은 관사는 남성도, 중성도 될 수 있는데, 중성으로 볼 때는 '악', 남성으로 볼 때는 '악한 자'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이것은 이 시대를 지배하며 계속 그들을 위협하고 있는 마귀가 주도하는 악한 세력까지도 '악'이란 말에 포함될 수 있다. 로마이어(E.Lohmeyer)는 "악에서"라는 말을 내적·외적인 모든 결정적 위험에 대한 총괄, 즉 사탄의 그 모든 능력에 대한 묘사로서 간주하고 있다(The Lord's Prayer). 벵겔(J.A.Bengel)은 그노몬(Gnomon)에서 말하기를, 여섯번째와 일곱번째 간구는 같은 문제에 대해 적극적이면서 소극적인 양면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혹자는 하나의 내용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는 마 6:13에 관한 힐러(Hiller)의 언급을 인용하고 있는데 '악한 자는 아담을 시험에 빠뜨린 이래 아직까지 그의 목적을 변형시키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악한 자이며,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적이자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의 적이다'고 해석했다.
③ "악". 포네로스는 중성 명사형으로 사용되어 '악'을 나타낸다(토 포네론, 눅 6:45b; 롬 12:9; 살전 5:22; 마 5:11; 행 5:4; 행 28:21). 신약성경은 여러 곳에서 악을 마귀와 연결시키고 있다. 마 9:4과 마 12:35에서 예수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그들의 악한 생각에 대하여 책망하실 때도 역시 포네로스는 마귀와 연관되었다. 그 외에도(요 8:44)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불렀다. 하나님과 마귀 사이에는 어떠한 중간 지대도 없으므로 악을 순수한 중성적 입장에 놓을 수는 없다.
(참조: J.H.Thayer; Harder; E.Achilles).
(10) blasfhmiva(988, 블라스페미아)
비방, 중상 slander, defamation, 모독 blasphemy.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블라스페미아(Eur., Democr. 이래)는
(a) '욕설',
(b) '중상, 비방(하는 말)',
(c) '신성 모독적인 언사'를 의미한다.
고전 헬라어에서 신(deity )에 대한 그릇된 표현이 신성모독으로 기술되기도 하였다(예: Plato). 신의 권위에 대한 의심도 그러하다.
(참조: H.W.Beyer).
2. 70인역본의 용법
블라스페미아는 70인역본에서 7회 나온다. 이 단어는 겔 35:12이하(네아차, 경멸)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모독하는 것, 마카베오이서 8:4에서 주의 이름이 모독을 받는 것, 마카베오일서 2:6에서 신성모독을 나타낸다.
3. 신약성경이 용법
블라스페미아는 신약성경에서 18회 나오며,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a) 블라스페미아는 사람과 관련하여 사용될 때, '중상, 비방, 욕설, 험담'이란 의미를 지닌다: 계 2:9; 막 7:22 및 병행구 골 3:8; 엡 4:31; 딤전 6:4.
(b) 블라스페미아는 종교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명사는 여러 구절에서 하나님에 대한 모독(훼방)을 나타낸다: 막 3:28; 마 12:31; 막 14:64; 마 26:65; 눅 5:21; 요 10:33; 계13:1; 계 13:5; 계 17:3. →987 블라스페메오,
(c) 논쟁의 대상이 되는 구절은 유1:9이다.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훼방하는 판결을 쓰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 거짓 교사들을 소돔과 고모라인들에 빗대어 말하고 있고(유 1:7), 육체를 더럽히며 권위(kyrioteta ; 참조: 9절의 Kyrios 의 사용)를 업신여기고 영광스러운 자들, 또는 영광들을 훼방한다고 비난하였다(유 1:8).
구약에는 단지 "그가(여호와) 그를(모세) 벳므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장사지내셨다"(신 34:6, 한글개역: "벳므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고만 기록되어 있다. 켈리(Kelly)는, 70인역본이 동사를 복수로 바꿈으로써("그들이 장사지냈다"), 신의 의인화(anthropomorphism)를 달갑지 않게 여겨 이를 제거하고자 시도하였다고 기술한다(op. cit., 265). 그러나 필로는 "불멸하는 천사적 권능들이 그를 장사지냈다"고 기술한다(Vit. Mos. 2, 291). 몇몇 초대 기독교 저술가들은, 유다의 기술이 모세 승천기에서 유래하였다고 생각했다. 이 책은 일찍이 1세기에 한 바리새인이 쓴 작품으로서 그것은 곧 헬라어로 번역되었던 것이다.
켈리(Kelly)는, 크리신 …블라스페미아스를 "그의 훼방에 대한 심판"보다는 "훼방하는 심판"(a reviling judgment )으로 번역해야 문맥과 더 잘 어울리는 이상, 이것이 가장 훌륭한 번역이라고 생각하였다. 천사장은 모세의 시체를 장사 지내는 일을 위임받았다. 그러나 사탄은 물질계의 주권자로 이 시체가 자신의 것임을 주장하며 또한 애굽인을 살해한 것에 대해(참조: 출 2:12) 모세를 고소하겠다고 위협하며 그를 방해하려고 최선을 다하였다. 이 진술의 요점은 천사장 미가엘이라 할지라도 욕설과 같은 것으로 응수하지 않고 슥 3:2에서 발견되는 기원(imprecation)을 사용함으로 사탄을 꾸짖는 책임을 하나님께 맡겼다는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이 배경에서 사람이 저주를 하는 것 뿐만 아니라 훼방하는 것 역시, 그가 가히 맞설 수 없는 지극히 큰 권능에 대한 도적 행위임을 알아야 된다는 고대 개념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본문은 계속하여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훼방하는도다 또 저희는 이성 없는 짐승 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는도다"라고 말한다(유 1:10; 참조: 고전 2:7-16). 이 구절에는, 신령하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훼방하기까지 한다는 의미가 있다. 따라서 이 의미는 공관복음서들에 나오는 의미와 유사하다고 생각된다(위의 5를 보라). 한편 여기에는 신자는 심판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는 의미도 있을 수 있다(참조: 롬 12:19; 신 32:35).
(참조: Walter Bauer; H.Wahrisch, C.Brown; O.Hofius; H.W.Beyer).
(11) uJperhfaniva(5243, 휘페레파니아)
교만, 거만, 자랑 pride.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휘페레파니아는 휘페레파노스(uJperhvfano", 5244)에서 유래했으며, '오만' arrogance, '거만' pride, '경멸, 모욕'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2. 70인역본의 용법.
휘페레파니아는 70인역본에서 53여회 나타난다. 휘페레파니아는 히브리어 가아(높다, 오만하다)의 파생어들의 역어로 시 17(16):10; 시 31:18, 시 31:23; 시 36(35):11; 시 59(58):12; 시 73(72):6; 잠 8:13; 암 8:7; 사 16:6; 렘 48(31):29; 겔 7:20; 겔 16:49, 겔 16:56; 단 4:34), 베차(이익)의 역어(출 18:21), 자돈(오만)의 역어(신 17:12; 삼상 17:28; 옵 1:3), 룸의 역어(민 15:30)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외경에도 나타난다.
3. 신약성경의 용법.
휘페레파니아는 막 7:22에서 단 한번 사용되었다. 휘페레파니아는 예수님께서 마음(→마음 heart)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단언하셨던 것들의 목록에 나온다. 예수님께서는 이 마음은 마음의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하지 그저 외면적인 정결의식 따위로는 치유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 7:21이하). 앤더슨(H. Anderson)이 이 구절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을 때, 그는 양식 비평적 접근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 목록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그 유사한 예를 찾을 수 없다. 이와 유사한 목록은 쿰란 종단이 사용하던 훈련교법서(1QS 4:9-11)와 롬 1:29-31; 갈 5:19-23(그리고 딤전 1:9-10; 딤후 3:2-5도 참조)에 나온다. 이것들은 헬레니즘의 영향을 보여주며, 일반적으로 헬레니즘 세계의 특성을 나타낸다"(The Gospel of Mark, New Century Bible, 1976, 188). 하지만, 헬레니즘이 팔레스틴 유대교와는 전혀 다르다는 견해는 이제까지 널리 인정되어 왔던 것만큼 그렇게 확실한 것은 아니다. 미덕 및 악덕의 목록이 스토아주의 문헌에 흔하게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목록은 또한 신구약 중간기의 문헌에서도 발견된다(예: 솔로몬의 지혜서 14:25이하; 헬라어 바룩서 4:17; 8:5; 13:4; 르우벤의 언약 3:3-6; 유다의 언약 16:1; 에녹이서 10:4이하). 또한 쿰란 문서에서도 이러한 예가 나오고 있다는 사실로 보아, 이러한 목록은 유대적 토양에 전혀 낯선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순전히 외면적인 정결의식으로는 인간의 가장 깊은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바리새인들과 정결례에 관하여 논쟁하실 때에, 이미 존재하던 유대교의 교리교육을 위한 목록을 친히 사용하였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세례(세례) Baptism; → 손 Hand). 기독교의 교리교육은 구약성경의 지혜(→ 지혜 Wisdom)전통을 이어받고 있는데, 구약성경의 지혜는 다른 방식으로는 잘 연결되지 않는 격언적인 말씀들을 엮어 놓은 것이다(그 밖의 목록으로는 롬 1:29이하; 롬 13:13; 고전 5:10이하; 고전 6:9이하; 고후 12:20; 갈 5:19이하; 엡 4:31; 엡 5:3이하; 골 3:5, 골 3:8; 딤전 1:9이하; 딤후 3:2-5; 딛 3:3; 벧전 4:3등이 있다).*
(12) ajfrosuvnh(877, 아프로쉬네)
어리석음, 분별없음.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아프로쉬네(Homer 이래)는 아프론(a[frwn, 878: 어리석은)에서 했으며, '어리석음, 분별없음, 지각이 없음, 부주의함'을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아프로쉬네는 70인역본에서 38회 나오며, 히브리어 느발라(5039: 무감각, 어리석음, 불명예, 치욕), 에웰레트(200: 어리석음, 어리석은 생각이나 행위)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모욕적인 행동'(삿 19:23; 삿 20:10), '어리석음'(삼상 25:25; 시 38:5; 시 69:5; 잠 18:13; 잠 27:22)이란 의미를 나타낸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아프로쉬네는 신약성경에서 4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아프로쉬네는 '어리석음'을 의미한다.
① 고후 11:1, "원컨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청컨대 나를 용납하라".
② 고후 11:17, "내가 말하는 것은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어리석은] 자와 같이 기탄 없이 자랑하노라".
③ 고후 11:21, "우리가 약한 것 같이 내가 욕되게 말하노라 그러나 누가 무슨 일에 담대하면 [어리석은] 말이나마 나도 담대하리라".
(살전 5:22-23, 바른) [22]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려라. [23] 화평의 하나님께서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흠없이 보존되기를 원한다.
(살전 5:22-23, NKJV) [22] Abstain from every form of evil. [23] Now may the God of peace Himself sanctify you completely; and may your whole spirit, soul, and body be preserved blameless at the coming of our Lord Jesus Christ.
(2) 한 영
(고전 6:16-17, 바른) [16] 창기와 합하는 자는 그 여자와 한 육체인 것을 알지 못하느냐? 말씀하시기를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라고 하셨다. [17] 주님과 합하는 자는 그분과 한 영이다.
(고전 6:16-17, NKJV) [16] Or do you not know that he who is joined to a harlot is one body with her? For "the two," He says, "shall become one flesh." [17] But he who is joined to the Lord is one spirit with Him.
(3)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요 17:20-22, 바른) [20] "내가 구하는 것은 이들만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말을 통해 나를 믿을 자들도 위한 것입니다. [21]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처럼 모두 하나가 되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하소서.그리하여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세상이 믿도록 하소서. [22]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그 영광을 나도 그들에게 주었으니, 이는 우리가 하나인 것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요 17:20-22, NKJV) [20] "I do not pray for these alone, but also for those who will believe in Me through their word; [21] "that they all may be one, as You, Father, are in Me, and I in You; that they also may be one in Us, that the world may believe that You sent Me. [22] "And the glory which You gave Me I have given them, that they may be one just as We are one:
(요 14:20, 바른) 그 날에는 내가 내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또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너희가 알 것이다.
(Jn 14:20, NKJV) "At that day you will know that I am in My Father, and you in Me, and I in you.
(4) 타락한 영은 마귀의 지배를 받음
(골 1:13-16, 바른) [13]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내시어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며, [14] 우리는 그 아들 안에서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다. [15]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며,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이시다. [16] 이는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들, 곧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 보좌들과 주권들과 통치들과 권세들이 그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만물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위해 창조되었다.
(골 1:13-16, NKJV) [13] He has delivered us from the power of darkness and conveyed us into the kingdom of the Son of His love, [14] in whom we have redemption through His blood, the forgiveness of sins. [15] He is the image of the invisible God, the firstborn over all creation. [16] For by Him all things were created that are in heaven and that are on earth, visible and invisible, whether thrones or dominions or principalities or powers. All things were created through Him and for Him.
(행 26:18, 바른) 그들의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고, 그들이 죄 용서를 받고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자들 가운데서 유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
(Ac 26:18, NKJV) 'to open their eyes, in order to turn them from darkness to light, and from the power of Satan to God, that they may receive forgiveness of sins and an inheritance among those who are sanctified by faith in Me.'
(5) 거듭난 영은 성령의 지배를 받음
(갈 5:16-18, 바른) [16] 내가 또 말하는데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여라. 그러면 결코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게 될 것이다. [17] 육체가 원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이 원하시는 것은 육체를 거스른다. 이 둘이 서로 대적하여, 너희가 바라는 것들을 하지 못하게 한다. [18] 그러나 너희가 성령에 의해 인도를 받으면, 너희는 율법 아래 있지 않다.
(갈 5:16-18, NKJV) [16] I say then: Walk in the Spirit, and you shall not fulfill the lust of the flesh. [17] For the flesh lusts against the Spirit, and the Spirit against the flesh; and these are contrary to one another, so that you do not do the things that you wish. [18] But if you are led by the Spirit, you are not under the law.
(요 16:13-14, 바른) [13]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니, 이는 스스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오직 들은 것을 말씀하시며,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14] 그분께서 나를 영화롭게 하실 것이니, 이는 그분께서 나의 것을 받아서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요 16:13-14, NKJV) [13] "However, when He, the Spirit of truth, has come, He will guide you into all truth; for He will not speak on His own authority, but whatever He hears He will speak; and He will tell you things to come. [14] "He will glorify Me, for He will take of what is Mine and declare it to you.
(6) 육혼영 잘못된 순서
(롬 12:1-2, 바른)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인애하심으로 너희에게 권하니, 너희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라. 이것이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이다.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여라.
(롬 12:1-2, NKJV) [1] I beseech you therefore, brethren, by the mercies of God, that you present your bodies a living sacrifice, holy, acceptable to God, which is your reasonable service. [2] And do not be conformed to this world, but be transformed by the renewing of your mind, that you may prove what is that good and acceptable and perfect will of God.
(7) 영혼육 올바른 순서
(고후 3:2-3, 바른) [2] 너희가 우리의 편지이니, 우리 마음에 기록되었고, 모든 이들이 알고 읽고 있다. [3] 너희는 우리의 섬김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편지로 나타났으니, 먹으로 쓴 것이 아니라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 판에 쓴 것이 아니라 오직 육체의 마음 판에 쓴 것이다.
(고후 3:2-3, NKJV) [2] You are our epistle written in our hearts, known and read by all men; [3] clearly you are an epistle of Christ, ministered by us, written not with ink but by the Spirit of the living God, not on tablets of stone but on tablets of flesh, that is, of the heart.
(요 4:22-24, 바른)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지만, 우리는 아는 분께 예배하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들에게서 나기 때문이다. [23] 그러나 참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오는데, 지금이 그 때이다.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 [24]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그분께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
(요 4:22-24, NKJV) [22] 'You worship what you do not know; we know what we worship, for salvation is of the Jews. [23] 'But the hour is coming, and now is, when the true worshipers will worship the Father in spirit and truth; for the Father is seeking such to worship Him. [24] 'God is Spirit, and those who worship Him must worship in spirit and truth."
(8) 오호라
(롬 7:20-25, 바른) [20] 만일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행한다면, 그것을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죄이다.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으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함께 있다는 것이다. [22] 내가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23] 내 지체 속에서 다른 법이 나의 마음의 법과 싸워, 나를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의 포로로 삼는 것을 본다. [24] 아, 나는 비참한 사람이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주겠느냐?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그러므로 나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고 있다.
(롬 7:20-25, NKJV) [20] Now if I do what I will not to do, it is no longer I who do it, but sin that dwells in me. [21] I find then a law, that evil is present with me, the one who wills to do good. [22] For I delight in the law of God according to the inward man. [23] But I see another law in my members, warring against the law of my mind, and bringing me into captivity to the law of sin which is in my members. [24] O wretched man that I am! Who will deliver me from this body of death? [25] I thank God--through Jesus Christ our Lord! So then, with the mind I myself serve the law of God, but with the flesh the law of sin.
(9) 마음은 전쟁터
(요 13:1-2, 바른) [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야 할 자신의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2] 만찬 때에 마귀가 이미 시몬의 아들 가룟 사람 유다의 마음에 주님을 넘겨줄 생각을 넣었다.
(요 13:1-2, NKJV) [1] Now before the feast of the Passover, when Jesus knew that His hour had come that He should depart from this world to the Father, having loved His own who were in the world, He loved them to the end. [2] And supper being ended, the devil having already put it into the heart of Judas Iscariot, Simon's son, to betray Him,
(잠 4:23, 바른) 그 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켜라. 마음은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Pr 4:23, NKJV) Keep your heart with all diligence, For out of it spring the issues of life.
(엡 6:10-20, 바른) [10] 마지막으로 너희는 주님 안에서, 그리고 그분의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 마귀의 술책에 대항하여 설 수 있기위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라. [12] 이는 우리의 싸움이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여라. 이는 너희가 악한 날에 대적하고 모든 것을 행한 후에 설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14] 그러므로 너희는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를 동이고, 의의 가슴막이를 붙이고, [15]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전할 준비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에 대하여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것으로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들을 능히 소멸시키며,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져라. [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모든 인내와, 성도를 위한 간구로 깨어 있어라. [19] 또 나를 위해 기도하기를, 내게 말씀을 주셔서 내가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해주시라고 하여라. [20] 이를 위해 내가 사슬에 매인 대사가 된 것은 내가 이 일에 마땅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엡 6:10-20, NKJV) [10] Finally, my brethren, be strong in the Lord and in the power of His might. [11] Put on the whole armor of God, that you may be able to stand against the wiles of the devil. [12] For we do not wrestle against flesh and blood, but against principalities, against powers, against the rulers of the darkness of this age, against spiritual hosts of wickedness in the heavenly places. [13] Therefore take up the whole armor of God, that you may be able to withstand in the evil day, and having done all, to stand. [14] Stand therefore, having girded your waist with truth, having put on the breastplate of righteousness, [15] and having shod your feet with the preparation of the gospel of peace; [16] above all, taking the shield of faith with which you will be able to quench all the fiery darts of the wicked one. [17] And take the helmet of salvation, and the sword of the Spirit, which is the word of God; [18] praying always with all prayer and supplication in the Spirit, being watchful to this end with all perseverance and supplication for all the saints-- [19] and for me, that utterance may be given to me, that I may open my mouth boldly to make known the mystery of the gospel, [20] for which I am an ambassador in chains; that in it I may speak boldly, as I ought to speak.
3. 육신의 정욕
(1) 죄를 짖는 것은 내가 아니라 죄다.
(롬 7:15-20, 바른) [15] 나는 내가 행하는 것을 알지못하니, 이는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않고, 오히려 미워하는 것을 행하기 때문이다. [16] 만일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행하면, 율법이 선하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다. [17] 그러나 지금 그것을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죄이다. [18] 나는 내 속, 곧 나의 육체 속에 선한 것이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다. [19] 나는 내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오히려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한다. [20] 만일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행한다면, 그것을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죄이다.
(롬 7:15-20, NKJV) [15] For what I am doing, I do not understand. For what I will to do, that I do not practice; but what I hate, that I do. [16] If, then, I do what I will not to do, I agree with the law that it is good. [17] But now, it is no longer I who do it, but sin that dwells in me. [18] For I know that in me (that is, in my flesh) nothing good dwells; for to will is present with me, but how to perform what is good I do not find. [19] For the good that I will to do, I do not do; but the evil I will not to do, that I practice. [20] Now if I do what I will not to do, it is no longer I who do it, but sin that dwells in me.
(2) 이생의 자랑
(요일 2:15-17, 바른) [15] 너희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마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사람 안에 없다.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육신의 정욕과 눈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17] 세상도 지나가고 세상의 정욕도 지나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한다.
(요일 2:15-17, NKJV) [15] Do not love the world or the things in the world. If anyone loves the world, the love of the Father is not in him. [16] For all that is in the world--the lust of the flesh, the lust of the eyes, and the pride of life--is not of the Father but is of the world. [17] And the world is passing away, and the lust of it; but he who does the will of God abides forever.
(3) 안목의 정욕
(요일 2:15-17, 바른) [15] 너희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마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사람 안에 없다.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육신의 정욕과 눈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17] 세상도 지나가고 세상의 정욕도 지나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한다.
(요일 2:15-17, NKJV) [15] Do not love the world or the things in the world. If anyone loves the world, the love of the Father is not in him. [16] For all that is in the world--the lust of the flesh, the lust of the eyes, and the pride of life--is not of the Father but is of the world. [17] And the world is passing away, and the lust of it; but he who does the will of God abides forever.
(4) 엡 2:1-3
(엡 2:1-3, 바른) [1] 하나님께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다. [2] 그때 너희가 이 세상의 풍조를 따라 죄 가운데 행하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라 행하였으니, 그는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활동하는 영이다. [3] 그때에는 우리도 다 그들 가운데 속하여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들을 행하여 우리 육체의 정욕 가운데서 살았고, 그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이었으나,
(엡 2:1-3, NKJV) [1] And you He made alive, who were dead in trespasses and sins, [2] in which you once walked according to the course of this world, according to the prince of the power of the air, the spirit who now works in the sons of disobedience, [3] among whom also we all once conducted ourselves in the lusts of our flesh, fulfilling the desires of the flesh and of the mind, and were by nature children of wrath, just as the others.
(5) 갈 5:19-21
(갈 5:19-21, 바른) [19] 육체의 일들은 명백하니, 곧 음행과 더러움과 방종과, [20] 우상 숭배와 마술과 원수 맺는 것과 다툼과 시기와 분노와 당 짓는 것과 불화와 이단과, [21] 질투와 술 취함과 방탕과 또 이와 같은 것들이다. 전에 너희에게 경고한 것같이 지금도 경고하는데, 이런 일을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이다.
(갈 5:19-21, NKJV) [19] Now the works of the flesh are evident, which are: adultery, fornication, uncleanness, lewdness, [20] idolatry, sorcery, hatred, contentions, jealousies, outbursts of wrath, selfish ambitions, dissensions, heresies, [21] envy, murders, drunkenness, revelries, and the like; of which I tell you beforehand, just as I also told you in time past, that those who practice such things will not inherit the kingdom of God.
(6) 고전 6
(고전 6:9-11, 바른) [9] 너희는 불의한 자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을 알지 못하느냐? 속지 마라. 음행한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남성 동성애자나, 동성 연애하는 자나, [10] 도둑질하는 자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남을 헐뜯는 자나, 약탈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이다. [11] 너희 가운데 이같은 자들이 더러 있었으나 너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으로 씻음을 받았고, 거룩하게 되었으며,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고전 6:9-11, NKJV) [9] Do you not know that the unrighteous will not inherit the kingdom of God? Do not be deceived. Neither fornicators, nor idolaters, nor adulterers, nor homosexuals, nor sodomites, [10] nor thieves, nor covetous, nor drunkards, nor revilers, nor extortioners will inherit the kingdom of God. [11] And such were some of you. But you were washed, but you were sanctified, but you were justified in the name of the Lord Jesus and by the Spirit of our God.
(7) 롬 1
(롬 1:28-32, 바른) [28] 또한 그들이 하나님을 인정하기 싫어하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림받은 마음에 내버려 두셔서 합당하지 않은 일을 하게 하셨다. [29] 그들은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로 가득 차 있으며,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수군거리는 자이고, [30] 비방하는 자이며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이고, 무례한 자이며 교만한 자이고, 자랑하는 자이며 악을 꾸미는 자이고, 부모를 거역하는 자이며, [31] 우매한 자이고 신의가 없는 자이며, 무정한 자이고 무자비한 자이다. [32] 그들이 이와 같은 일을 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는 하나님의 심판을 알면서도, 그런 일을 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하는 자들을 옳다고 한다.
(롬 1:28-32, NKJV) [28] And even as they did not like to retain God in their knowledge, God gave them over to a debased mind, to do those things which are not fitting; [29] being filled with all unrighteousness, sexual immorality, wickedness, covetousness, maliciousness; full of envy, murder, strife, deceit, evil-mindedness; they are whisperers, [30] backbiters, haters of God, violent, proud, boasters, inventors of evil things, disobedient to parents, [31] undiscerning, untrustworthy, unloving, unforgiving, unmerciful; [32] who, knowing the righteous judgment of God, that those who practice such things are deserving of death, not only do the same but also approve of those who practice them.
4. 성령의 열매
죄를 짖지 아니함
(요일 5:18, 바른) 하나님께로부터 난자마다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분이 그를 지키시므로 악한 자가 그를 손대지도 못한다.
(1Jn 5:18, NKJV) We know that whoever is born of God does not sin; but he who has been born of God keeps himself, and the wicked one does not touch him.
(갈 5:22-24, 바른) [22]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친절함과 선함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이다. 이러한 것들을 반대할 법이 없다. [24]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자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갈 5:22-24, NKJV) [22] But the fruit of the Spirit is love, joy, peace, longsuffering, kindness, goodness, faithfulness, [23] gentleness, self-control. Against such there is no law. [24] And those who are Christ's have crucified the flesh with its passions and desires.
(1) 사랑과
ajgavph(26, 아가페)
사랑 love.
1. 성경 외의 용법.
명사 아가페는 아가파오(ajgapavw, 25: 사랑하다)에서 유래한 후기 헬라어이며, 성경 외의 문헌에서는 단 한번 발견되는데, 바로 여신 이시스(Isis)에게 아가페라는 칭호가 붙여졌다(P.Oxy. 1380, 109; A. D. 2세기).
--> 아가파오(ajgapavw, 25)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아가페는 70인역본에서 19회 나오며 아하바(160: 사랑)의 역어로 사용되어 연애(삼하 13:15), 남녀의 사랑(렘 2:2)에 대하여 주로 사용되었으며, 아가서에서 주로 나타난다(아 2:4이하; 아 3:5; 아 3:10; 아 5:8; 아 7:6; 아 8:4 이하).
70인역본이 의미가 복잡한 에로스보다는 오히려 보다 단순한 단어인 아가페를 사용하는 것도, 인간의 모든 사상, 감정, 행위 그리고 예배가 하나님의 선행 작용에 대한 하나의 반응이기 때문이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아가페는 신약성경에서 116회 나오며, '사랑, 애정, 호의, 자비심'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단어는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아가페는 인간의 사랑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① 고전 8:1; 고전 13:4-고전 13:8; 빌 1:9; 롬 13:10; 마 24:12; 롬 12:9; 고후 6:6; 딤전 1:5; 요일 4:16; 고전 13:1-고전 13:3; 빌 2:2; 고전 14:1; 딤전 6:11; 딤후 2:22; 골 3:14; 벧후 1:7; 골 1:8; 살전 1:3; 고후 8:8; 히 10:24; 빌 2:1; 벧전 5:14; 몬 1:7; 롬 14:15; 엡 5:2; 골 4:21; 엡 4:15; 고전 16:14; 엡 3:17; 엡 4:2; 골 2:2; 살전 5:13; 엡 4:16; 갈 5:13; 갈 5:6; 몬 1:9; 살전 3:6; 살전 5:8; 딤전 1:14; 딤후 1:13; 몬 1:5; 엡 6:23; 딤전 2:15; 딤전 4:12; 딤전 6:11; 딤후 2:22; 딤후 3:10; 딛 2:2; 계 2:19; 고전 13:13; 골 1:4 이하; 살전 1:3; 살전 5:8; 딤후 1:7; 롬 12:9; 고후 6:6; 벧전 4:8; 갈 5:22; 롬 15:30; 골 1:8; 살후 2:10; 엡 1:15; 골 1:4; 살전 3:12; 살후 1:3; 고후 2:4; 고후 2:8; 벧전 4:8; 요 13:35; 고후 8:7; 고전 16:24.
(c) 아가페는 초대교회에서, 친교의 입맞춤이라는 형태로 표현되었다. 이 입맞춤은 회중 예배시, 하나의 정규적 순서였었다(예: 롬 16:16; "거룩하게 입맞춤으로"[엔 휠레마티 하기오]). 벧전 5:14에서 "사랑의 입맞춤"(엔 휠레마티 아가페스)이라는 표현이 나타난다. 사실상 이 의식(rite)의 상세한 사항들은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
(d) 유 1:12에서 복수 아가파이스는 "애찬"(love-feasts)을 의미한다: "저희는 기탄 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의 애찬의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이 애찬은 '초대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예배와 관련하여 형제적인 사랑을 북돋우고 표현하기 위해' 함께한 식사를 말한다. 이단자들은 애찬에 참석하는 것을 자기네의 탐욕과 부도덕을 증진시키는 기회로 삼았으며, 심지어 고린도 교회는 이단자들로 인하여 분열되어 파당이 생기고 술취한 자들의 난장판이 되기도 하였다(고전 11:17-22).(D. R. Rose).
[아가페는 초대 교회 의식들 중의 하나를 뜻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는 단지 암시적으로 나타나 있을 뿐이다. 고전 11:17이하는 성찬식이 평상의 식사와 함께, 후에 "애찬"(love feast, 아가페)이 주의 만찬 자체로부터 분리되었으며, 그 본연의 위치에서 거행되었다(참조: 유 1:12; 벧후 2:13; Ign. Smy. 8:3; Clem. Alex., Paedogogus 2, 1).
그 차이점은, 설교가 행해지는 예배나 성찬식 예배의 중심이 기쁨에 찬 신앙의 선포였던 반면, 공동 식사의 주요한 의의는 그들이 아가페 속에서 함께 나눈 특별한 친교의 실시에 있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분명히 이와 같은 예배는 신도들이 사회적 자선 행위를 통해 자기들의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참조: 행 6:1이하).
(W. Gunther; H.-G. Link, TBZNT)]
(e) 아가페의 헬라어 의미는 대등한 사람들간의 존경과 호의이다. 기독교의 아가페는 하나님과 그의 자비 앞에서는 모두 똑같이 가치없음을 자각함으로부터 비롯된다. 이 사랑(caritas)의 정신에 의해 형제들에 대한 태도와 교제가 결정된다. 따라서 이 새로운 형제애는 에로스로 인해 타락하고, 승화된 에로스에 의해 스스로를 초월하려고 헛되이 시도하는 세상 안에서 성장하여 간다. 바꾸어 말하면 바라지 않고 주는 사랑을 아는 교회가 성장한다. 감각과 초감각이 혼합된 신비적 사교들이 아 뮈스테리아 아가페스(사랑의 비밀)의 맑고 깨끗함 앞에 굴복한다.(E. Stauffer).
초대 교회에서 형제들과 자매들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던 여러가지 이름들은, 아가페(agape)에 기초를 둔 이 새 공동체가 그들 스스로를 하나님의 가족으로 이해했다는 증거이다.(W. Gunther, H.-G. Link).
카라는 70인역본에서 50여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심한(기쁨, 즐거움)과 사손(기쁨, 즐거움)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카라는 신약성경에서 59회 나타나며,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a) 문자적으로는 '기쁨, 즐거움'을 의미한다.
① 마 13:20; 병행구, 막 4:16; 눅 8:13에서 카라는 '말씀을 받는 (부정적) 기쁨을 표현한다: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마 28:8에서 제자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두려움 뿐만 아니라 큰 기쁨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눅 1:14에서 사가랴에게 카라의 약속이 주어졌다: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남을 기뻐하리니".
눅 10:17에서 70인의 제자는 악령을 제어할 수 있는 예수님의 능력을 공유할 수 있었고 기쁨과 만족이 가득하였다: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눅 15:7; 눅 15:10에서 카라는 잃은 것을 찾은 자의 기쁨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잃은 자를 긍휼히 여기신다; 모든 것은 거기에 달려 있다. 하나의 죄인이 회개할 때 하늘에서 기뻐한다. 진실로, 잃은 양과 잃은 은전, 잃은 아들의 비유를 담고 있는 누가복음 15장 전체가 보여 주는 바는, 아버지께 돌아온 잃은 자에 대해, 예수님께서 인간들에게 자기와 함께 기뻐하라고 촉구하고 계신다는 것이다(눅 15:6, 눅 15:9, 눅 15:32).
눅 24:41, 눅 24:52에서 카라는 놀라움과 넘치는 기쁨을 표현한다: "41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52 저희가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② 행 13:52에서 제자들은 성령께서 힘주심을 통해 핍박을 받을지라도 기쁨을 경험하였다: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박해가 복음의 승리적 진행을 정지시킬 수 없다(행 20:24). 행 8:8에서 보면,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파되고, 그들이 믿을 때, 그리고 이적이 나타날 때 거기에 해당된 사람들은 크게 기뻐하였다.
③ 요 3:29에서 카라는 '기쁨'의 충만이라는 중요한 특징을 표현한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세례(세례) 요한은, "신랑" 즉 약속된 하늘의 진리의 계시자로 인하여 지금 기쁨이 충만해 있다(참조: 마 9:14이하).
요 15:11에서 예수님은 완전한 기쁨을 가지고 계셨으며, 이 기쁨은 제자들에게도 부여될 수가 있었다. 이것을 그는 아버지께 요청한다(요 17:13).
요일 1:4에서 카라는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사귐으로 가지는 기쁨을 표현한다: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요 16:22에서 카라는 장차 슬픔을 대신할 기쁨을 표현한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현재의 슬픔은 기쁨으로 변할 것이다. 이 종말론적 기쁨은, "어떤 황홀한 정신적 상태로 묘사되지 않고, 신자들이 더 이상 아무 것도 바랄 필요가 없는 상황으로 정의된다"(R.Bultmann).
④ 바울 서신들은, 기독교인의 기쁨은 슬픔과 고통과 근심 가운데서만이 얻을 수 있다는 역설적 의미를 증거하고 있다. 진실로 이와 같은 사실이야말로, 이 기쁨의 능력을 확실히 증명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기쁨의 원천은, 단순한 지상적, 인간적 기쁨 너머에 있다. 그것은 엔 퀴리오 즉 주 안에 있는 기쁨이며 따라서 우리의 외부에 있는 것이다. 빌 1:25; 롬 15:13에서 그것은 "믿음과 기쁨"이다(빌 1:25; 롬 15:13). 그것은 소망, 믿음, 확신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 믿음은, 모든 싸움과 두려움(고후 7:5)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통한 칭의(justification)를 확신하며(롬 8:31이하), 부활하신 주님으로서의 그의 재림을 고대한다. 믿음의 기쁨으로서, 그것은 또한 성령(→ 영 Spirit)의 → 열매 Fruit이기도 하며(갈 5:22), 성령 안에서의 기쁨이라고도 불린다(롬 14:17; 살전 1:6). 이처럼 기쁨은 하나의 영적 은사이며, 이러한 점에서 카리스(charis: → 은혜 Grace)의 개념과 근사하다.
고후 1:24에서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고 확언하였다. 고후 2:3에서 바울은 주 안에 있는 기쁨인(참조: 고후 13:11; 빌 3:1) 자기의 기쁨을 모두가 함께 나눠 갖도록 하기 위해 편지를 썼다.
고후 7:13에서 카라는 안심에서 오는 기쁨을 표현한다: "이로 인하여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 우리의 받은 위로 위에 디도의 기쁨으로 우리가 더욱 많이 기뻐함은 그의 마음이 너희 무리를 인하여 안심함을 얻었음이니라".
바울은 그들을 이전에 엄히 책망했었으나, 그의 권면이 결국 유익한 효과를 가져왔기 때문에 그들에 대하여 다시 안심하게 되었다.
⑤ 히 10:34에서 카라는 극심한 박해와 위험을 초월하는 기쁨을 표현한다: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당시에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는 이미 극심한 경지에 이르러 교회의 존속 그 자체까지 위협을 받을 정도였다(참조: 벧전 4:13; 롬 8:17). 그러나 비록 물질적 재산을 빼앗겼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들의 기쁨까지 빼앗을 수는 없었다. 이것은, 시 46편에 영감을 받은 루터의 찬송가 "견고한 성"(Ein' Feste Burg)의 마지막 몇 행이 잘 예증해 준다:
그리고,
우리의 생명, 재산, 영예, 자녀, 아내까지,
그들이 취하여도
그것의 유익은 하찮도다;
이는 모두 사라질 것:
하나님의 도성의
영원함이여.
⑥ 약 1:2은 순교에 대해 기뻐하라는 기독교적인 가르침에 가깝다(참조: 약 5:10이하). 그러나 교회사상(敎會史上) 이것은 종종, 사실상 순교 그 자체를 위해 순교를 추구하는 것으로 변질되었다. 약 4:9이하에 대해서는, 그 말씀을 신약에서 말하는 구원의 믿음과 같은 것으로 잘못 생각하여, 율법주의적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순종으로써 그와 같은 견해는 배척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견해는 십자가 상에서 이룬 그리스도의 사역의 일회적, 영구적 가치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b) 환유적으로는 ① 카라는 '기쁨의 대상'을 나타낸다. 빌 4:1에서 카라는 아무개의 기쁨이 되는 인격체에 대해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살전 2:19이하에서 카라는 같은 용법을 나타낸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② 카라는 '기쁨의 상태'를 나타낸다. 마 25:21; 마 25:23에서 카라는 "주인의 즐거움" 곧 주께서 누리는 지복을 나타낸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마 25:21).
히 12:2에서 하늘의 하나님 우편에 있는 지복을 나타낸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그리스도 자신의 기쁨을 기꺼이 버리고 스스로 십자가의 부끄러움을 지셨다. 오직 그를 바라봄으로써 우리는 시험에서의 참음과 인내를 얻을 수 있다(히 12:2).
③ 카라는 '즐거운 잔치'를 나타낸다. 마 25:21; 마 25:23에서 카라는 '잔치',또는 '축하, 회식'이라는 의미도 가진다.
(참조: E. Beyreuther; G. Finkenrath; Walter Bauer's GEL NT).
(3) 화평과
eijrhvnh(1515, 에이레네)
평화, 복지, 번영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에이레네의 기본 개념은 본래 사람들 사이의 관계(relationship)나 태도(attitude)를 의미하지 않고 상태(state), 즉 '평화의 때', 또는 '평화의 상태'를 의미하며, 처음에는 순전히 끊임없이 계속되는 전쟁상태에서의 한 막간(a interlude)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 단어는 전쟁에 반대되는 것, 혹은 전쟁의 종식으로부터 결과하는 상황을 의미한다. 평화는 복된 번영을 가져 오도록 법과 질서가 유지되는 상태이다. "에이레네"는 평화의 상태이며, 평화의 상태에서 땅과 백성을 위한 복이 흘러나온다. 필레몬(Philemon)은 이를 최고의 선(supreme good)으로 격찬했다.
에이레네는 평화 조약이나 평화의 타결과 관련이 있다. 에이레네는 또한 소란, 소요의 정반대를 의미할 수 있다. 에이레네는 평화적인(온화한) 태도, 즉 적의가 없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에픽테투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의 스토아 철학자들의 작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에이레네는 영적 평안이나 마음의 평안이라는 의미를 띠고 나타나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단어는 이들의 저작에 그리 자주 사용되지 않았다.
특별한 언급으로, 아우구스투스(Augustus)가 지중해 세계를 지배한 에이레네를 들 수 있다. 이 시대에서 구속(redemption)을 동경하는 강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데 황금시대라고 불리워진 이 평화의 상태는 로마 황제가 군대의 힘으로 성취한 법적 또는 정치적 안정이다(Toerster, TDNT).
2. 구약성경 및 70인역본의 용법
1. 구약성경 및 70인역본의 용법 및 의미들
(a) 구약성경에서 에이레네는 250회 이상 나오는 히브리어 단어 샬롬의 역어로 사용된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이에 대하여 예외적인 경우들은 대체로 왕래 및 문안 인사에 관련된 구절들이다. 예컨대 창 26:31; 창 43:23이 이러한 예이다.
그러나 렘 20:10; 사 48:22; 사 57:21은 이러한 경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예외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예외적인 구절에서는 소테리아(구원, 구출), 카이레인(기쁨, 안녕)등이 역어로 사용되었다.
약 15개의 구절에서 에이레네는 안식, 평온, 안전, 염려 없음, 믿음직스러움 등의 광범위한 의미 영역을 포괄하는, 히브리어의 여러 가지 단어들에 해당하는 역어로 사용되었다.
예컨대 대상 4:40에서는 '…로부터 안식을 얻다'를 뜻하는 샤카트(히2453)의 역어로, 욥 11:18; 잠 3:23; 사 14:30; 겔 34:27; 38:8; 겔 38:11; 겔 38:14; 겔 39:6, 26에서는 '믿을만함, 안전, 염려없음'을 뜻하는 베타흐(히233a)의 역어로, 삼하 3:24에서는 '가다, 걷다'를 뜻하는 할라크(히498)의 역어로, 사 29:24에서는 '이해'를 뜻하는 레카흐(히1124a)의 역어로, 그리고 잠 17:1; 호 2:18에서는 '평온, 안락'을 뜻하는 샬와(히2392d)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또한 에이레네를 역어로 사용하고 있는 몇몇 구절들은 해당 히브리어 단어가 모호하거나 없다: 에 4:16; 미 2:4; 사 32:4; 겔 34:29; 잠언 8:18.
(b) 70인역본은 히브리어 단어들, 주로 샬롬의 역어로 사용했기 때문에, 그 히브리어의 의미들이 이 헬라어의 의미에 영향을 미쳤으며, 또한 70인역본의 용법은 헬라어를 사용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헬라어는 새로운 풍부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샬롬과 70인역본의 에이레네를 살펴보면, 에이레네의 여러 가지 의미를 알 수 있다.
이 단어는 '평화 peace'라는 좁은 의미로 제한시켜서는 안된다. 그것은 모든 가능한 형태의 악(evil)과 대조되는, 가장 넓은 의미의 '안녕, 복리' well-being를 의미한다. 만남이나 편지에서(삼하 18:29; 삿 19:20; 단 4:1), 작별 인사에서(삿 18:6; 삼상 20:42) 다른 사람들에게 안녕을 빌며, 대화에서 다른 사람에 관한 안녕을 구한다(삼상16:5). 사람들은 문안 인사를 한다 : "문안하고".
왕하 9:17이하에서와 같이 어떤 사람이 오는 이유에 대한 질문이 있는데, 곧 "평안이냐"는 '도전적인 목적이냐 화평한 목적이냐'라는 질문이다.
왕상 2:13에서 밧세바가 아도니아를 맞이 하면서 "화평한 목적으로 왔는냐"(너의 옴이 화평이냐)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그녀가 그에게 그의 방문이 '좋은 일'을 뜻하는지를 실제로 묻고 있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에이레네를 '행운이나 형통'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는데, 불경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적용되고 있다. 의인은 악인의 이런 형통을 봄으로 시험을 받기도 한다(시 73:3). 그러나 이 형통은 외적인 것에 불과하며, 진정한 형통이 아니다(사 48:22).
사 57:18; 시 38:3에서는 육체의 건강을 의미한다.
집회서 38:8에서 의사가 가져오는 에이레네, 즉 건강에 대해 말하고 있다. 전장에서 무사히 안전하게 돌아오는 사람은 건강을 보전한 것으로 볼 수 있다(수 10:21; 왕상 22:17; 대하 19:1; 시 55:18).
또 이 단어는 '만족이나 흡족함' satisfaction을 의미하였는데, 이별에 관하여(창 26:29; 출 18:23; 사 55:12), 잠자리에 드는 것에 관하여(시 4:8), 죽음에 관하여(창 15:15; 렘 34:5) 사용되었다. 여기에서 에이레네는 단순히 안식이나 마음의 평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폭력이나 재난으로 압도당하지 않은 인간의 전상태로서, 폭력을 당하거나 변사의 정반대를 의미한다(참조: 왕상2:6).
또한 살펴볼 가치가 있는 것은 사 29:24의 내용이다: "원망하던 자도 교훈을 받으라"(70인역-말더듬는 혀들은 평화를 말하는 것을 배울 것이다). 이 구절에는 히브리어 샬롬이 없지만 에이레네가 나온다. 이 문맥에서 에이레네는 그들이 올바르게(에이레네) 말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이사야 32:4에서도 이와 유사한 의미를 나타낸다.
이 단어는 더욱 보편적으로, 전쟁과 대조되는 평화를 의미한다. 잠 17:1; 호세아 20:18("평안히 눕게하리라")과 사 14:30("평안히 눕게 하려니와")에서 이 의미로 에이레네가 샬롬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잠언에서는 다투는 가정과 대조되는 평화로운 가정의 안락을 의미하며, 호세아와 이사야에서는 이 단어는 평화의 때를 의미한다.
대상 22:9에서 평화의 상태를 의미한다: "내가 저의 생전에 평안과 안정을 이스라엘에게 줄 것임이니라". 히스기야는 평화가 그의 시대에는 계속된다는 기대를 가졌기 때문에 이사야의 중대한 예언을 경솔히 취급했다. 여기에는 번영을 누리는 그룹, 예를들면 국가의 번영이라는 의미도 지닌다.
에이레네는 전 3:8에 전쟁과 대조시킨 "평화"와, 그리고 렘 29:7에 "성읍의 평안", 38:4에 "백성의 평안" 등에서 "평안을 구한다"는 표현에서와 같이 "평화의 상태"보다 더 근본적인 것, 즉 평화 =백성의 안녕에 관련된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샬롬/ 에이레네는 상태보다 오히려 관계를 암시한다.
많은 구절에서 이 단어는 이러한 의미를 가지는데, 국가나 그룹 간의(왕상 5:12; 삿 4:17; 왕상 5:4; 대상 12:18), 개인 간의(슥 6:13) 우호적 관계를 의미한다.
신 20:10에 '한 백성에 평화를 선언'하는 것은 한 백성의 관계의 수용을 의미하며(참조: 삿 21:13), 그 안으로 들어가는 자들은 평화의 사신들이다(사 33:7).
이 단어는 시편 35:27에서 외적 형통이나 성공에 더하여 인간의 전적인 안녕(well-being)을 의미할 수 있다: "나의 의를 즐거워하는 자로 기꺼이 부르고 즐겁게 하시며 그의 종의 형통을 기뻐하시는 여호와는". 여기서 형통과 안녕은 선(good)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시편 122:8에서 시인은 "네 가운데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한다. 70인역본에는 '내가 참으로 너를 위하여(에 관하여) 평화를 말했다'고 번역되어 있다. '너를 위하여'는 '예루살렘을 위하여'이다.
시인은 바로 앞에서 이미 안녕과 형통을 원했다. 환언하면 이 용어는 여기서 확고한 '형통'이라는 의미에서 '선(good)'이라는 더 넓은 의미로 쉽게 이동한다.
따라서 잠 3:17에서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 첩경은 다 평강이니라"고 말한다. 70인역본은 '그녀의 길은 옳은 길이요 그녀의 모든 첩경은 평화에 있느니라'고 번역했다.
시 34:14은 도덕적 선을 의미한다: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그를) 따를지어다."
슥 8:19에서 "오직 너희는 진실과 화평을 사랑할지니라."
말 2:6에서 "그가 화평과 정직한 중에서(으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들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 70인역본은 '그가 그의 길을 에이레네로 똑 바르게하여 내 앞에서 행하게 하며…'라고 번역했다.
잠 12:20에서 "악을 꾀하는 자의 마음에는 궤휼이 있고 화평을 논하는(조장하는) 자들에게는 희락이 있느니라." 70인역본은 '에이레네를 원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리라'고 번역했다. 이러한 구절에서 '에이레네'는 도덕적 선을 의미한다.
(c) 이 단어는 두람(J. I. Durham)에 의하면, '완전, 완성, 성공, 성취'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샬롬은 '완전'이란 개념은 민 6:24이하에 나오는 축복의 절정을 이루는 대목에 나타난다. 여기에서 이 개념은 다른 모든 축복들을 요약하고 있으며, 여호와의 임재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 축복은 모세가 여호와로부터 받아 아론과 그의 자손들에게 이스라엘을 축복하는데 사용하도록 전한 것이다(민 6:22 이하). 이 축복의 내용은,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이다(민 6:24이하).
여기에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찌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민 6:27)는 구절이 첨가되었다. 두람은 이 구절을 주석하기를 '샬롬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오직 그가 임재하실 때에만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축복 속에 샬롬이 사용된 것을 볼 때에도 샬롬은 제의 용어로서 사용되었으며, 여러 가지 번역본이나 많은 주석가들이 일반적으로 이 말에 부여해 온 것보다 횔씬 더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다 확실하게 믿게 된다. 왜냐하면 민 6:24-26 에 나오는 샬롬은 하나님께로부터 축복을 받고(바라크) 지킴을 받으며(샤마르) 은혜를 받는(하난) 사람, 하나님의 임재 속에 이 두가지 상태로 있는 사람, 즉 충족되고, 그리하여 온전하게 된 사람을 묘사하는 말로서 사용되고 있다. 실로 이러한 사람은 신약성경의 주의 말씀에 부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또 두람은 '샬롬은 구약성경에서 자주 포괄적으로 본 성취 또는 완성, 실제로 사람이 혼자 힘으로 가장 좋은 환경에서 얻을 수 있는 그 어떤 성공이라도 훨씬 능가하는, 삶과 정신에 있어서의 완성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된다'라고 주장한다(창 15:15; 창 29:6; 창 37:14; 창 43:27이하.; 출 18:7; 출 18:23; 민 25:12; 신 23:7; 삿 18:15; 삼상 17:18; 삼상 17:22; 삼상 20:7; 삼상 25:6; 삼하 11:7; 삼하 18:28이하; 왕상 22:27이하; 왕하 22:20; 사 45:7; 사 48:18; 사 53:5; 사 54:10; 사 54:13; 사 57:2; 사 57:19; 사 59:8; 사 60:17; 사 66:12; 말 2:5이하.).
특히 이 점은 왕하 22:20에 나오는, 요시야가 열조에게 돌아가리라는 여호와의 약속에서 분명하게 제시되고 있다. 여기에서 요시야가 평안히(in peace, KSB) 열조에게 돌아간다는 식의 해석보다는, 그는 '성공하여 in success', 즉 그의 소명을 완성하고 흡족한 마음으로 열조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래서는 항목을 만들어 에이레네의 의미를 설명한다.
2.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에이레네
이 단어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로서, 선, 좋은 것, 구원을 의미한다. 샬롬/ 에이레네와 연합된 좋은 것은 그것들을 위한 기도에서든, 그것들이 나타날 때 하나님의 선물로 인정하든, 자연적으로 이스라엘에서 항상 하나님과 관련시켰다.
기드온은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샬롬'이라고 불렀다. 이 매우 오래된 고대 표현에 대한 분명한 해석이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이 고백의 위대한 의미에는 경건한 자들이 후에 많은 다른 상황에서 말하고자한, 특별히 구약의 기도에서 표현된 것과 같은 모든 것을 그 근본에 포함하고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평화를 만드시며(욥 25:2), 또한 우리에게 평화를 약속하시며, 그의 백성에게 평화의 복을 내리시며, 그의 종들의 형통을 원하신다(시 35:27; 참조: 시 147:14), "다윗과 그 집에는 여호와로 말미암은 평강이 영원히 있으리라"(왕상 2:33).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시 122:6).
샬롬은 진실로 여호와로부터 오며, 완전히 충족하게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신념은 시편 85편에 두드러지게 표현되어 있다. 기자는 기도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그가 그 백성, 그 성도들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 … 영광이 우리 땅에 거하리이다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입맞추었으며"(시 85:8-10).
이 사상의 맥락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성향은 완전한 지상적 평화의 동기로 생각된다. 여기서 우리는 샬롬이라는 말의 구약의 용법의 최고점을 본다.
레위기에서 하나님은 그 땅에서 그의 백성에게 샬롬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신다(레26:6). 이 문맥은 확고한 복이 뜻하는 것, 즉 원수들과 야수들로부터 평화를 아주 분명히 보여 준다. 이것은 특별한 의미에서 일종의 구원이다. 그것은 약속의 땅에서 안식과 평온이며, 그러므로 신명기 기자는 독특한 용어 메구하(안식)를 표현한 것이다(신 12:9). 이렇게 그들은 예언적 약속의 바로 가까이에 있다.
에이레네는 이 시대나 구원 시대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가리키는데 사용되게 되었다. 이 단어가 어떤 생활 영역에서나 하나님이 주신 선을 의미한다는 것은 구약신앙의 특성이다. 사 46:7에서 그 일반적인 기사를 볼 수 있다: "나는 평안도 짓고 환란도 창조하니". 이 경우에는 앞에서 언급한 레위기 26:3이하의 축복과, 그리고 민 6:26의 축복("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도 포괄한다.
때때로 에이레네의 정확한 내용을 말하기란 불가능하지만, 한편 그것이 항상 인간을 위한 선한 것이며, 거기에 그의 안녕이나 구원이 놓여있는 것이다. '에이레네'는 이런 의미에서 선한 것이며 구원이다.
이러한 구원을 의미하는 구절들을 더 들어보면, 렘 29:11에서 하나님은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라고 말씀하셨다. 시 119:165에서 율법을 사랑하는 자들의 큰 평화는 율법을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들이 당하는 장애물과 대조된다. 여기에 평화는 내적 구원이며 파멸이 아니다.
따라서 집회서 1:18에서 에이레네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증진되고 '기에이아 야세오스'(건강한 치유, 완전한 건강)와 연결되어 있다(참조: 사 9:7). 시 35:8과 시 35:9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평화는 구원이며, 이 문장에서 평화와 구원이 연결되어 있다.
이 구원은 렘 16:5에서 하나님의 구원이라 부른다: "나의 평강". 애 3:17에 "주께서 내 심령으로 평강을 떠나게 하니"라는 말은 "내가 복(아가다: 선, 선한것)을 잊어버렸음이여"라는 말로 해석되어야 한다. 여기서 평강은 선한 것이며, 곧 구원이다. 이 평화에 참여한다는 것은 거기에 포함된 구원의 은총을 누린다는 것을 뜻하는 반면, 평화에서 제외된다는 것은 그 모든 복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평화를 거두어 가시면 어쩔 수 없이 애통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히브리인들은 때때로 이러한 동맹이나 협정에 대해 베리트(언약)를 사용했으며, 따라서 샬롬은 베리트와 관련하여 나타난다. 이 두 단어의 관계는 너무 강하므로, 이런 문맥에서 샬롬은 일종의 공식 용어가 된 것같다.
이 사상은 샬롬의 관계가 언약에서 두 당사자에 의해 인쳐진다는 것이다(수 9:15; 왕상 5:12). 환언하면, 언약은 '샬롬'의 관계를 개시하는 것이다. '샬롬'의 관계는 언약의 결과이다. 여호와의 이스라엘과의 화평의 언약을 나타내는, 이러한 구절들에서 '샬롬'은 실질적 안녕이 아니라 언약을 맺은 자들의 성향에 의존하는 평화의 관계를 의미하는 동시에 구원을 위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비누하스와 평화의 언약(민 25:12; 집회서 45:24), 레위와 평화의 언약(말 2:5), 다윗과 평화의 언약(겔 34:25; 겔 37:26)은 구원의 언약이다.
사 54:10에서 여호와께서는 "나의 인자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화평케 하는 나의 언약은 옮기지 아니하리라"고 약속하신다(Rad, TDNT).
3. 종말론적 기대의 한 요소로서 샬롬/ 에이레네
샬롬은 종말론적 기대의 한 요소이다. 영원한 평화의 최종적 상태에 대한 대망은 선지서들과 다른 성문서들에서 일관하게 표현하는 구약 종말론의 한 요소이다.
이 널리 퍼진, 다방면에 걸친 이 대망의 사실은 샬롬이라는 단어가 관계하고 있는 구절들에서 항상 발견되지 않을지라도 언급되고 있다.
낙원의 상태의 회복이 예언될 때(사 11:10이하; 호 2:20이하; 암 9:11이하), 하나님의 주관하에 국제적인 평화가 예언될 때(사 2:2이하), 혹은 평화의 때가 도래하는 마지막 시대의 한 겸손한 평화의 왕에 대한 기대를 말할 때(슥 9:9이하), 샬롬이라는 단어가 이런 중심적인 종말론적 구절에 사용되지 않거나 슥 9:10에서와 같이 오직 많은 다른 것들 곁에 사용될지라도, 우리는 가능한 한 가장 넓은 의미의 샬롬에 관한 예언적인 선포를 듣게 된다.
따라서 그 단어가 실제로 발견되는 구절들에 대해 어떤 보다 큰 비중을 두지 않는다. 사 9:5에 메시야 아이의 이름들에서 그 최종 이름 샬롬 사르(평화의 왕)는 의미의 중요성에 있어서 선행하는 다른 이름들과 다를 바 없다. 그 이름은 하나님의 사명(commission)을 지닌 분(사 9:1-6)으로서의 메시야는 도래하는 메시야 왕국의 평화의 보증인(guarantor)과 보호자이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것은 사 9:7의 가장 중요한 기사에서 다시 다윗의 보좌와 결부된 구원을 위해 영원히 있을 것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미 5:5에서 "이 사람은 우리의 평강이시다"라는 표현은 이 전체 예언의 본질을 요약한 것이다.
피조된 세상은 지금은 그것이 저지른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받고 있고 스스로 분열하고 있지만, 결국은 다시 온전하게 될 것인데(사 11:6-9; 사 29:17-24; 사 6:1-9), 그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것이다(사 65:17-19; 참조: 계 21:1-4).
평화에 관한 언약의 갱신에 관련된 메시지는 우주적이고 영속적인 평화에 관한 약속으로 발전되었으며, 이 구원의 날의 도래는 하나님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사 61:1-2)로서 평화의 나라의 담지자요 설립자인 평강의 왕(사 9:5-6)에 자주 결부되었다.
흥미있는 점은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가 모든 풍부한 의미를 지니는 데도 불구하고 어느 곳에서도 특별히 내적인 평화의 태도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참으로 그것이 개인보다 오히려 그룹에 대해 사용되는 구절들이 더 많다.
개인에 대한 용법의 전형적인 보기로서, 애 3:17을 들 수 있다: "주께서 내 심령으로 평강을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내가 복을 잊어버렸음이여". 그러나 여기에 샬롬도 감추인 내적인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외적 안녕의 형태로 나타낸다. 그룹과 관련된 대부분의 보기에서 샬롬은 분명히 외적으로 드러내보일 수 있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Rad, TDNT).
샬롬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열망에 관련된 사회적 차원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순전히 개인적인 영역을 훨씬 넘어서는 공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샬롬이 체다카(의, 사 48:18; 시 86:10)와, 그리고 미쉬파트(재판, 슥 8:16)의 실제적 이상과, 나아가 심지어는 페쿠다(관리, 사 60:17)와 밀접히 관련된다는 사실이 입증된다. 이것은 또한 가장 보편적인 용례에서 이 단어는 개인적 개념어라기 보다는 사회적 개념어임을 시사한다(H. Beck, C. Brown , DNTT).
4. 예언자의 메시지로서의 샬롬/ 에이레네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에서 에스겔까지의 소선지자들은 거짓 선지자들이 선포한 구원의 메시지를 강렬하게 대항했다. 수세기를 통해 계속된 이 투쟁에서 모든 사람의 주의를 끈 표어는 샬롬(평화)이다. 참으로 전문 용어 인나베 레샬롬(그는 평화를 예언한다)은 이와 관련하여 나타난다(렘 28:9).
샬롬은 어떤 선지자 서클의 정점이었으며, 따라서 이 용어는 두 파당 사이의 심한 투쟁의 중심이 되었다. 문제는 이미 구원의 선지자들을 반대한 미가야의 입장에서 보여졌다. 그러나 이 용어 자체가 나오지 않는다(왕상 22:5이하).
미가는 몇몇 대항자들과 싸웠는데 그들을 이득을 얻기 위하여 예언하는 자들이라고 비난했다. 그들은 이득이 있는 한, 구원을 선포할 것이다: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는 이에 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 도다…"(미 3:5이하).
예레미야는 그 치열한 투쟁에 투신하여 선지자들로부터 가장 강렬한 저항을 받았다. 큰 고통 중에서 예레미야는 샬롬 에메트(영원한 구원)를 약속하는 예루살렘의 운명이 무엇인지를 말한다(렘 14:13이하).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 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렘 6:14). 렘 28장에서 예레미야와 이런 선지자들 간의 극적인 교전의 이야기를 읽는다. 예레미야와 하나냐 간의 문제의 요점은 샬롬(평화)이냐, 라아(환란)이냐 이다.
최종적으로, 에스겔은 거짓 선지자들이 구원이 없는데도 샬롬 하존(구원의 이상)을 본다고 하며 백성을 잘못 인도했다고 동일한 항의를 했다(겔 13:16이하). 여기서 "이들은 예루살렘에 대하여 예언하여 평강이 없으나 평강의 묵시를 본다하는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니라…"며, 대항한다.
거짓 선지자들의 문제는 샬롬의 문제를 넘어가며, 이 문맥에서 추적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의심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선포한 샬롬이 신화적 개념으로 옷 입은 궁극적 종말론적 평화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실제적 정치적 평화, 즉 모든 중대한 정치적 문제가 잘 해결되어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보장하는 평화 가운데서 살 수 있다는 약속이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마치 예레미야가 처음에 이 견해를 함께 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다음에 여호와께서 "이 백성에게서 평강을 빼았으셨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렘 16:5).
거짓 선지자들의 프슈도스(yeu'do", 5579: 허위, 거짓말)는 그들이 샬롬을 예언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예레미야와 에스겔도 다른 상황들에서 이것을 예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그들이 백성의 죄를 알지 못했으며, 따라서 절박한 심판에 관하여 어두운 정치적 장면을 해석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예레미야와 에스겔로서는 대응 표어 에인 샬롬(평강이 없다)이란 표어를 만들었다(렘 6:14; 렘 8:11; 렘 12:12; 렘 30:5; 겔 13:10; 렘 13:16).
거짓 선지자들의 샬롬과 예레미야와 에스겔의 에인 샬롬 간의 싸움은 강도를 더하여 갔으며, 그러나 주전 597년과 586의 예루살렘의 정복과 멸망으로, 어떤 긴장 완화가 있게 되고, 구원을 예언했던 거짓 선지자들은 철저히 불신을 당했다. 이제는 새롭고 더 큰 의미에서 샬롬의 약속은 예레미야와 에스겔의 예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따라서 예레미야는 사로잡힌 자들에게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악이 아니라 구원을 생각하신다는 놀라운 기사를 기록한다(렘 29:11). 여기에서 우리는 예레미야서에 있는 후기 구원 예언의 근거를 본다. 다른 나라들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가져올 구원을 보고 떨 것이다(렘 33:9). 동일한 주제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맺은 평화의 언약에 대한 에스겔의 절정에 달한 메시지에 다시 등장한다(겔 34:25; 겔 37:26이하).
샬롬에 대한 싸움은 이사야의 마지막 장들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여기서 샬롬은 벌써 선지자의 입장의 어떤 중요한 양상을 보여주는 표어가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이 예언의 충분하고 장엄한 요지의 하나이다.
만일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말씀을 들었다면, 그들의 샬롬은 강과 같이 흘러내렸을 것이고 그들의 체다카(의)는 바다의 물결과 같이 되었을 것이다(사 48:18). 여기서 이 평행 관계는 이 용어가 지금 한 영적 의미를 받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유사하게 사 54:13에서 예루살렘 자손에게 약속한 구원의 복은 체다카(의)의 복과 결부되어 있다. '샬롬'과 '체다카'의 동일한 결합은 하나님의 새 도성에 대한 예언적 표현에서 나타난다: "내가…화평을 세워 관원을 삼으며 의를 세워 감독을 삼으리니 다시는 강포한 일이 네 땅에 들리지 않을 것이요 황폐와 파멸이 네 경내에 다시 없을 것이며 네가 네 성벽을 구원이라 네 성문을 찬송이라 칭할 것이라"(사 60:17-18).
사 32:17에 의하면 샬롬은 의의 결과이다: "의의 공효는 화평이요 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이 시적 예언에는 '샬롬'이 더욱 실제적 의미로, '카보드'(영광)와 연결되어 있는 사 66:12에서 다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가능한 가장 풍부한 음조를 발하는 것이 있다.
여기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아름다운 소리로 "먼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사 57:19)고 한 것과 같이 평화는 풍부한 기대를 표현하는 용어지만, 더욱 정확한 신학적 용어로 해석되지 않은 용어이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어떤 모호함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러한 많은 측면적 용어를 잘 사용하지 못하는 번역자들은 때때로 이러한 구절들에서 샬롬이 그의 회복된 백성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이상, 더욱 현실적인 '안녕, 복리 well-being'를, 더욱 분명한 '평화 peace'를, 신학적으로 더욱 포괄적인 '구원 salvation'을 사용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3. 랍비들, 위경 등 유대 문헌의 용법
1. 랍비들의 문헌
(a) 랍비 문헌에서 평화라는 개념 전체에 깔려 있는 것은 여호와의 샬롬이다. 그러나 이 개념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와 그리고 순전히 인간적인 차원에서 모두 그 의미가 확대되었다. 샬롬은 인사말로서 만날 때('샤알 베샬롬', 안녕을 구하거나 비는 말)나 작별할 때(안녕히 가라) 상대의 안녕을 구하는 것이다. 살롬으로 인사하고 인사에 답한다.
또한 샬롬은 '순조(順調), 안녕, 안전'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pBer, 60에는 임신 6개월 부터 9개월 까지 순조로운 출산(순산)을 위해 기도한 것과 아이의 가고 오는 길에서의 보호,곧 안전을 위한 언급이 있다. 그리고 '휴식이나 안식'이란 의미로도 나타난다. 샬롬은 유대인의 무덤비에서 '안녕이나 구원'이란 의미로 기록되었다.
(b) 랍비 문헌에서도 구약성경에서와 같이 샬롬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주시는 선물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바벨론의 18개의 간구는 그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복이 임하기를 기원하는데 그 최종 간구는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복과 평화가 임하기를 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샬롬은 베레카(복, 지복)와 병행되고 같은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비록 유대인들 간에 메시야 시대의 평화의 개념에 대하여 견해차가 있었지만, 평화는 의인의 몫이며, 구약성경에서와 같이 메시야 시대의 지복(Blessings)의 총화이다. 이사야 52:7은 이것에 대하여 언급한다.
(c) 샬롬은 또한 사람들(개인들, 가정, 단체, 국가들) 간의 투쟁의 반대어이다. 따라서 사람들 간의 화평케 하는 것에 대해 자주 강조한 내용을 찾아 볼 수 있다. pea.,1.1에 의하면 이것은 그 열매들을 즐기는 것들 중에 하나이다. 학자들의 역할은 세상에 평화를 증진시키는 일이며(Ber 64a), 엘리야는 와서 세상에 평화를 먼저 확립한다(Eduy. 8:7). 예배에서 평화를 위한 기원으로 끝맺지 않은 축도나 기도가 없다(Lev. R. 9:9). '샬롬'은 하나님의 이름들 중 하나이다(Shab. 10b; 2:1, 4b). UK. 3:12에 '거룩한 자여, 그는 찬양을 받으리로다. 그 안에 평화보다 더 가치있는 어떤 복을 간직하고 있는 그릇이 없도다'라고 말한다.
Rabban Simeon b. Gamaliel의 기록에 '세 가지, 즉 진리와 심판과 평화로 말미암아 세계가 보존된다'고 하였다(Avot 1:18). 이 기록에 의거하여 탈무드(Talmud)는 '만일 심판이 집행되면 진리가 지지를 받고 평화가 증진되기' 때문에 그 세 가지는 사실상 하나라고 선언한다(TJ, Ta'an. 4:2, 68a). 탈무드 랍비들의 최고 이상은 평화이기 때문에 그들은 할 수만 있으면 평화를 위하여 정의나 심판을 유보하거나 제외하였다.
힐렐(Hillel)에 있어서 아론은 평화를 추구하는 자의 한 모델이다(Ab,.1,12; ckawh, Str.B,.1.217). S.NU(42.6:26)에는 이방인들이나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의 죄가 있을지라도 그들이 평화하는 한 사탄이 그들을 해칠 수 없다고 한다. 랍비들은 호 4:17을 해석하여 '이스라엘이 우상들과 연합되어 있을지라도 평화가 그 안에 우세하고 있는 한 그대로 두라'고 가르친다(Gen. R.38:6).
평화를 확립하기 위하여 진리의 엄격한 노선에서 벗어나는 것도 허락되었으며(Yer. 65b), 탈무드는 민 5:23에 관련하여 '만일 남편과 아내 사이에 평화를 확립하기 위하여 신성하게 기록된 하나님의 이름을 지울 수 있다면, 전세계의 평화를 이루기 위하여 참으로 더욱 많이 그렇게 해야 한다'고 선언한다. 랍비들은 성경 자체와 모순하여 어떻게 사람들 간의 평화를 지지하는지를 설명한다(CKAWH,Slav. En. 52:11-13).
이것은 이웃의 '샬롬', 곧 구원을 구하는 문제가 아니라 다툼의 종식이라는 의미의 [샬롬]을 구하는 문제이다. 아마도 이것은 불일치나 불화가 메시야의 도래를 방해한다는 사상에 의한 것같다. 랍비들의 기록은 시기, 다툼, 불화가 하나님의 뜻에 반대가 된다는 강한 신조를 명시하고 있다. 이 견해에 따르면, 바로 세상의 존속은 평화에 의존한다(Ab., 1,18). 물론 하늘에 있는 것들 역시 불화할지라도 그렇다는 것이다(참조, 골1:20).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하여 구약성경에서 발견하지 못하는 '샬롬'의 용법을 도입하게 한다. 다마스커스 문서는 하나님이 모든 육체와 다투고 있다는 사실로 시작한다. 이 다툼은 평화를 이루는 장막을 만들기까지 널리 펴져 나간다. 우상숭배와 같은 죄들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반목을 조성하지만(Lv. r.,7 on 6:2), 제단의 돌들은 그들 간의 평화를 조성한다M. Ex., 29 등). 하나님과 사람 간의 평화와 다툼은 사람이 두 가지, 곧 긍정적으로와 부정적으로 행동하는 상호관계를 포함한다.
(d) 앞에서 살펴본 바, 샬롬은 유대인이 대망하던 구원의 핵심 바로 그것으로 되어있다. 이러한 평화를 추구하고( Rabbi Hille1, Aboth I:I2. SBI 217) 사람들 사이에 평화를 세우는 것은 반드시 해야만 할 일이었다. 랍비들의 가르침에서 평화롭게 하는 자의 역할은 신약성경에 나오는 그것과 유사한데, 이 점에서 랍비 유대주의는 신약성경의 '새 계명'과 비슷하다.
하지만 여기에서의 근본 동기는 이유에 대한 적극적인 사랑이라기보다는 샬롬을 방해할런지도 모르는 모든 것을 제거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순전히 인간적인 차원에서 적용되는 것은 또한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이리하여 평화라는 개념은 사람이 행한 것과 행하지 않은 것 모두를 한층 중요하게 생각하는 새로운 차원을 얻게 된다. 이러한 평화에 대한 개념은 구약 시대 이후 발전한 새로운 용법에 큰 영향을 주었다.
2. 위경, 요셉푸스, 필로
(a) 위경에서 종교적 용법을 고찰해 보면, Test ⅩⅡ에서 '평화의 천사'라는 말이 나타난다. 여기에서 에이레네는 Test. L. 18:4와 D. 5:9,11에서와 같이 전쟁의 중단으로 표현된 구원을 의미하지만(Test. Jud. 22:1이하) 그것은 구원의 효과를 내지 못한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Test. ⅩⅡ와 특별히 Eth. En에서 평화의 반대는 랍비들의 견해와 같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또는 인류와 투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이다. Eth. En에 의하면 불경건한 자에게는 긍휼과 평화가 없고(5:15), 하늘의 타락한 수호 천사들에게는 평화도 없고 용서도 없지만(12:5), 반면에 의인에게는 평화가 약속되어 있다.
그러나 Eth. En. 1:17이하에 의하면, 평화는 심판의 유보 또는 비집행이며, 따라서 평화는 용서와 심판자의 긍휼과 연결되어 있다. 그렇지만 평화는 또한 빛과도 연결되어 있어서 긍정적인 의미를 함축하며, 구원을 뜻하기도 한다. 이러한 의미의 평화는 '평안히 내버려 두었다'란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할 수 있다. 열 두 족장의 유훈에서 평화는 재판을 유보하는 것, 즉 범법자를 동정하여 유예해 주는 것, 혹은 적어도 그에 대한 형벌의 집행을 유예하는 것을 의미한다. 위경에서 평화는 또한 인간들 사이의 일치나 화합을 의미하기도 한다(Foerster, TDNT; H.Beck, C. Bro wn, DNTT).
(b) 요세푸스는 구약성경과 랍비들의 용법을 철저하게 따른다(Ant. 1, 179; 11, 216; 8, 405; War 2, 135).
(c) 필로는 언어학적으로, 그리고 실질적으로 헬라 전승을 따른다. 그에게 있어서 에이레네는 정치적 평화와 욕망의 싸움과 대조로, 오직 하나님께만 속하고(Heinemann,413ff), 하나님으로부터만 찾아 얻을 수 있는 내면적 안식인 마음의 평안을 의미한다(Vit. Mos., 1, 304). 그렇다고 해서 평화의 외면적이고 객관적으로 입증이 가능한 상태를 가리키는 측면과 무관하지 않다. 내면적, 외면적으로 싸움과 평화는 그룹을 이룬다. 내면적 싸움이 가장 나쁘며, 그것이 모든 악의 근원이다. 필로는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아서 역시 내면적 평화를 유혹과 탐욕에 대한 승리로 간주하였다(Jos. 57). 이디오피아어 에녹서 52:11은 '평화와 사랑을 가져오는 자는 복이 있다'라고 선언하고 있다(Foerster, TDNT).
3. 쿰란 문서
쿰란 공동체는 변절한 이스라엘로부터 자신을 분리시켜(1QS 8:4-9; CD 1:4과 해당 구절) 자신을 구원 받은 자들의 종말론적 공동체라고 생각하였다. 이 공동체의 성원들은 이미 종말론적 평화를 향유하는 경지에 들어간 것이다.
그들의 문헌에서는 영원한 평화(IQS 2:4), 평화의 넘치는 풍요( IQS 4:7), 끝이 없는 평화(IQH 7:l5), 지속적인 평화(IQH 15:16), 제한 없는 평화(IQH 18:30) 등에 관한 구절이 나온다. 그러나 이 공동체는 아직도 투쟁의 와중에 있다(CD 4:13 및 그 밖의 해당 구절에서는 벨리알과 이스라엘 및 미가엘의 싸움이 언급되고 있고, IQM 1:9 이하에서는 빛의 아들들과 어둠의 아들들의 싸움이 언급되어 있다).
평화의 도래는 재난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IQH 1:17). 구원은 구원을 받을 사람들이 불 붙는 용광로 속에서 연단을 받은 후에라야만 참된 것으로 인정 받는다(IQM 17:1). 하나님은 이미 영원 무궁한 평화의 언약(구원)을 생명의 바늘로 새겨 놓으셨다(IQM I2:3). 이러한 평화는 더 이상 거절을 당하지 않으며(IQH 9:11), 구원의 복으로 충만한 피난처가 된다(IQH 9:33). 평화는 구원과 행복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평화'(IQM 3:5; 4:14)와 '하나님의 기쁨'은 하나님의 백성이 안전한 그들의 고향에 도달하는데 필요한 암호이다(1QM 3:11).
4. 신약성경의 용법
1. 서론
에이레네는 신약성경에 92회 사용되었으며, 요한 1서를 제외한 신약의 모든 성경에 나온다. 복음서에 25회(마 4회, 막 1회, 눅 14회, 요 6회), 사도행전에 7회, 바울 서신에 47회, 야고보서에 3회, 베드로서에 5회, 유다서에 1회, 요한서신과 계시록에 4회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에서 에이레네의 변화 또는 발전된 의미를 모두 추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단어는 형태와 내용에 있어서 70인역본과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전통을 착실히 따르고 있다. 그리고 랍비 문헌의 샬롬과 같은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추가로 고전 헬라어 문헌에 나타난 의미들이 그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신약성경에서의 의미는 인사와 그리고 유사한 표현에서 안녕(well-being)이나 구원(salvation)이란 의미를 가진다.
막 5:34(눅 7:50)와 약 2:16에서 작별 인사로, 눅 10:5; (눅 24:36); 요 20:19; 요 20:21; 요 20:26에서 도착 인사로 사용되었으며, 당시 팔레스틴에서 유행한 인사를 번역한 것이다.
행 16:36에서 누가가 로마 간수의 인사말로 "평안히 가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그는 분명히 그 인사말을 70인역본에서 취했으며, 새 언약의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인사말이라고 생각했다.
사도 바울 역시 항상 그의 편지서들에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라는 인사말을 사용했다.
계 1:5에도 동일한 인사말이 나온다. 이것은 히브리인과 아람인의 인사와 같은 것이다.
디모데전·후서, 요한이서, 그리고 유다서에서는 자비를 뜻하는 말과 함께 사용되었으며, 평화는 또한 예를 들어 벧전 5:14; 요삼 1:15에서처럼 끝맺는 인사말에 나온다. 구약성경의 평안히 가라와 비슷한 말이 행 15:33과 고전 16:11에 나오며, 눅 2:29에 나오는 시므온의 말도 이와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
안전(security)이란 의미의 에이레네는 눅 11:21에서 찾아볼 수 있다(참조: 살전 5:3). 고전 14:33에서는 구약성경의 영향이 한층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데 여기서 에이레네는 무질서의 정반대이며, 교회 안의 무질서에 반대되는 상태를 나타낸다. 행 24:3.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의 주요 의미는 분명히 헬라적인 의미가 아니라 보다 깊은 의미에서의 구원이다. 에이레네는 인간 간의 일치 또는 조화를 나타내며(행 7:26; 갈 5:22; 엡 4:3; 약 3:18; 참조: 벧전 3:11), 하나님과의 화평도 의미한다.
에이레네는 행 12:20; 행 24:3; 마 10:34; 계 5:4에서는 전쟁과 반대되는 평화에 대해 사용되었다. 바울은 이 단어를 영혼의 평안에 대해 사용하는데(참조: 롬 15:13), 이런 용법은 매우 드문 헬라의 용법이다.
눅 14:32에서는 평화의 조건을 구하기보다는 오히려 인사하는 것을 뜻하는 아람어투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문맥상으로는 존경과 무조건적 복종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그 용법상 세 가지 중요한 개념을 지니고 있다. - ⑴ 안식의 느낌으로서의 평화, ⑵ 하나님과의 화해의 상태로서의 평화, ⑶ 그리고 종말론적 구원으로서의 평화이다. 이 중 마지막 의미가 기본적인 것이다.
2. 가장 광범위한 의미에서 만물의 정상적인 상태로서의 에이레네
고전 14:33에서 바울에게 있어 에이레네는 고린도 교회에서 생각을 예언함으로 야기된 어지러움(혼란스런 상태)과 반대되는 정상적인 상태이다.
영감을 주시는 하나님은 어지러움(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평화의 하나님이시다. 영감은 다툼과 혼란을 위한 구실을 허용하지 않고 있으며, 따라서 시기와 분쟁은 하나님의 임재의 표시가 아니다. 여기서 지적하는 원리는 이적(miracles)이 법의 위반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법을 위반하는 편이 아니라 법을 지키므로 결과하는 평화, 곧 질서의 편이다. 이 질서의 평화는 진정한 교회의 정상적 상태인 것이다(고전 14:33; 약 3:16과 비교).
평화는 공동 예배(고전 14:33)와, 사도와 그의 협동자들 간의 교제에 결정적인 요인이 되는 것이다. 이 의미에서 에이레네가 분명히, 강조적으로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신약성경의 다른 곳에서 주목을 끄는 내부와 외부 사이의 관계를 보여준다.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건강한 또는 정상적인 상태는 하나님에 의해 영혼이나 인류에 제한되지 않고 전 우주에 미치는 것이다(참조: 1corinthians, ICC; V. Hasler, EDNT; Foerster, TDNT).
3. 인간의 종말론적 구원으로서의 에이레네
(a) 여기에서 출발점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구원, 특별히 종말론적인 구원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구약성경의 샬롬이다.
눅 1:79에 사가랴의 찬송에서 에이레네는 대망한 종말론적 구원이다.
눅 2:14에 천사의 찬송에서 에이레네는 사람들 중에 평화나 하나님과 평화 뿐만이 아니라 이제 땅으로 온 구원을 가리킨다.
눅 19:42에 "평화에 관한 일"과 눅 19:38에 "하늘의 평화"도 구원이다.
계 12:10과 계 19:1에 "구원(소테리아)은 에이레네와 동일한 것이며, 그 의미는 (요한계시록에서 소테리아와 동일한) 에이레네가 하늘에 있고 하늘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역사적 사건으로 온다. 히 13:20은 이것을 "평강의 하나님"과 "양의 큰 목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내신 자"를 동일시 함으로써 넌지시 암시한다.
히 7:2은 그리스도의 전형으로서의 멜기세덱은 살렘 왕, 곧 평화의 왕이시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 구원은 평화의 복음으로 선포된다(엡 6:15; 참조: 행 10:36; 엡 2:17). 그것은 그리스도의 구원이다(요 14:27). 세상은 오직 [샬롬]을 원하며, 그리스도는 자기가 확보한 구원을 주신다.
예수님은 관습적인 작별인사를 사용하셨으며(막 5:34; 병행구, 눅 7:50), 예수님은 친히 제자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 평안의 인사(이 집에 평안이 있을 찌어다)를 가르쳐 주셨다. 제자들이 어느 집에든지 들어갈 때 하는 인사는 소원이 아니다. 그 평안은 그대로 거절하거나 받거나 해야 하는 선물이다. 그러므로 만일 거절하면 참으로 그 평안은 제자들에게로 돌아오는 것이다(눅 10:5이하; 마 10:13). 이스라엘의 마지막 세대는 최종적 선택을 직면하고 있다. 평화의 인사 형태에 동반하는 구원의 말없이 어느 성읍이나 집에도 들어갈 수 없다. 이 인사를 받는 사람은 누구든지 '평화의 아들'이 되지만 이 인사를 거절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으로부터 영원히 제외되어 있는 것이다(V. Hasler, EDNT).
그리고 편지서들(롬 1:7; 고전 1:3; 고후 1:2; 갈 1:3; 빌 1:2; 살전 1:1; 몬1:3)과 계시록(계 1:5)에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라는 인사 또는 축도의 말은 특수한 의미를 지닌다. 유대인의 축복 공식문은 '긍휼과 평화'이다(2bar. 78:2). 바울은 이 축복문에서 '긍휼' 대신 '은혜'를 취하여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있기를 원하노라)"라고 축복한다.
그는 "은혜와 평강"을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시키므로, 예배 의식을 따랐다. 이 축복으로 그는 그의 독자들에게 주님의 구원의 은사를 수여하는 것이다.
그는 이 은사를 고전 1:4-9의 서언에서 더욱 정확히 묘사하며, 갈 1:4에서 그 축복을 이어 부언하고 있다. 후자에서 카리스(은혜)는 희생제사의 방식으로 설명되어 있고, 에이레네는 악한 현세대로부터 구원 받는 해방의 과정으로 설명되어 있다. 사도 요한이 그의 계시록 서언에서 독자들에게 한 축복도 바울의 축복이 의미하는 바와 같은 것이다.
우리는 이 구원을 구해야 한다: 히 12:14에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경고한다. 이 문구에서 에이레넨 메타(개역, 더불어 화평함)는 다른 사람들과 일치나 화합을 의미하지 않는다. 저는 다리가 고침을 받을 수 있는 우리의 발을 위한 곧은 길을 만들라는 권고 후에 모든 사람과 교제하여 구원을 구하라는 명령이 뒤따른다.
이 구원은 골 3:15에서 마음을 다스리는 능력이다.
이 구원은 빌 4:7에서 사람을 보호하는 능력이다.
어떤 학자들은 6절에 비추어 이것이 불안에 반대되는 평안감을 의미한다고 하지만 동의하기 어렵다. 그것은 신자가 보호받는 왕국이다. 비록 인간 관계 속에서 이 구원이 때때로 사람의 외적인 일들과 동일하지 않으며, 심한 적대적인 경험으로 인도할지라도 그렇다(마 10:34이하).
(b) 이런 구절들에서 에이레네는 실질적으로 조에(생명)와 병행하며, 바울은 롬 8:6에서 평안과 생명을 동일하게 취급한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바울은 육신의 노력은 사망, 영의 노력은 에이레네로 인도한다고 말한다. 그는 7절의 첫 부분에 근거를 둔다. 육신의 노력은 하나님께 대적하는 것이며 오직 사망으로 인도한다. 조에(생명)와 다나토스(사망)가 종말론적으로 그대로 받아들일 존재 양식인 것과 같이 조에(생명)는 그와 병행하는 에이레네와 함께 있다.
에이레네(= 샬롬 = 구원)는 최종적 성취의 상태이며, 새로운 피조물의 정상적 상태이다. 이와 같은 특징은 벧후 3:14에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안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엔 에이레네) 나타나기를 힘쓰라."
여기에서 에이레네는 기본적인 내적 성벽이나 내적인 평안도, 하나님의 은혜도 아니며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형성된 심신의 회복과는 별도로, 상상할 수 없는 완전한 복지(안녕)나 정상 상태를 암시한다.
이 의미에서 바울의 더욱 친숙한 인사는 때때로 데오스 테스 에이레네스(평화의 하나님)로 말한다. 이 묘사는 바울이 평화의 하나님을 기대한 것과 확고하게 연결되어 있다.
평화의 내용은 문맥에서 결정될 수 있다. 롬 16:20에서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고 말했는데, 이 사탄의 파멸은 구원의 일부이다. 평강(화)의 하나님('데오스 테스 에이레네스')이란 말은 하나님이 평화와 지복을 시행할 것이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탄을 멸하실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벧후 3:14과 실질적으로 동일한 정도의 구원과 복지(안녕)의 절대적인 내용은 살전 5:23에 나타난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실 때에 흠이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에이레네는 바로 '영적 번영'이 아니라 전인간, 곧 영혼과 몸의 구원이다. 동일한 의미는 히 13:20이하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에이레네는 카리스(은혜)의 결과인 영혼의 평화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인간의 구원을 의미한다.
구약성경과 랍비적 용법에 근거해서, 에이레네는 이와같이 가장 심오하고 포괄적인 의미를 요구한다. 에이레네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미 일어나고 있는 전인(whole man)의 종말론적 구원이다. 그것은 확실한 성취의 상태로서 카이네 크티시스(새로운 피조물)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 의미에서 구원은 예수님의 부활에서 계시되었다(참조: Foerster, TDNT; H.Beck, C.Brown, DNTT; V.Hasler, EDNT 등).
4. 하나님과의 화평으로서의 에이레네
신약성경에서 에이레네는 하나님과의 평화의 관계에 대하여 드물게 사용되었다. 그 첫 언급은 엡 2:14-엡 2:17이다. 바울은 사 57:19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그러므로 구원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용어가 15절에 나타날 때 그 반대어 에크드라(증오, 적의; 개역, 원수된 것)에 대하여 어떤 해석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사람들의 적의를, 어떤 해석자들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적의를 의미한다고 한다.
만일 율법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갈라놓고 이스라엘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이 두 가지 역할을 알지 못한다면 이 구절들을 거의 올바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율법으로 말마암아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적대와, 또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적대가 일어난다. 사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하여, 그리고 율법을 위하여 그들 자신들을 이방인들로부터 분리하고 이방인들을 원수로 생각해야 했으며, 이방인들은 그런 유대인을 적대적으로 대했다.
따라서 14절에 "그는 우리의 화평(에이레네)이시라"는 포괄적인 의미를 나타낸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폐하셨을 때, 두 가지 무질서 곧 사람들 중에 무질서와 하나님에 대한 무질서를 파기하셨다.
이 에이레네는 하나님과의 평화와 인류 중에 평화를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은 질서, 모든 관계의 회복(healing)을 의미한다. 그래서 15절에 에크드라(원수된 것)란 표현도 일반적인 의미를 가진다. 15절에 "화평하게 하시고"와 16절에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도 역시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에크드라와 에이레네는 여기서 인종 안에서 많은 서로 다른 형태를 취하는 객관적 상태들이다.
만일 하나님과 평화가 이 구절에서 에이레네의 일부이라면 롬 5:1에서 에이레네는 그 유일한 의미를 나타낸다. "하나님으로 더불어"라는 말이 보여주는 것과 같이 이 언급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적한다. 이것은 롬 5:10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원수들이며, 하나님이 그들과 화해하셨다는 사실에 동의한다(참조, 엡 2:16). 그래서 다음 평화는 사람이 변경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상호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의 사역을 하심으로써 신자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가지게 되는 관계이다.
5. 인간의 상호 평화로서의 에이레네
롬 14:17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말한다. 그는 강한 자들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는 그들이 생각하는 바와 같이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먹고 마시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서 의와 평화와 희락의 통치로 되어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희락(카라)"은 15절의 "근심하게 되"(뤼페이타이)어서는 안되는 것을 보여 주며, 의(디카이오쉬네)는 여하한 사람의 양심도 침해 당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생각나게 한다. 평화(에이레네)는 하나님의 나라에는 어떠한 종류의 질병이나 악이나 불화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계속하여 이 영역에서 그리스도를 봉사하는 자들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사람들의 마음에 든다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하여 "평화에 관한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라는 권고를 한다. 여기에 에이레네는 오이코도메(덕을 세움)와 병행하는 것이며, 그것은 분명히 상호 간의 평화를 의미한다. 그렇지만 17절에서 에이레네는 이것보다 더 큰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것은 성령 안에서 건강을 증진시키는 어떤 것의 창조, 즉 '에이레네'를 함축한다. 그렇지만 실제적으로 로마에 있는 교회에 적용하면, 이 건강을 증진시키는 일은 의심 없이 평화이다.
우리는 고전 7:15의 난해한 말에 동일한 사상의 어떤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화평 중에서 너를 부르셨느니라". 바울이 만일 이방인 배우자가 결혼을 파하려고 하면 기독교인 배우자는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주님께서 이혼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과 모순되는 것같이 보인다: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 받을 것이 없느니라". 이것은 오직 주님의 말씀, 곧 우리는 이러한 경우에 노예들과 같이 구속받지 않는다는 말씀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15절에서 우리는 제한(restriction)이 아니라 이유(reason)를 가진다. 여기에 '데'는 '그러나 but'가 아니라 '오히려 rather'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 부름에 대한 언급은 바로 앞에 말한 것을 위한 근거를 확립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오히려'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언급된 개인적 경우를 넘어가서, 하나님이 우리를 평화로(혹은 평화를 위하여) 부르신 것을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말하는 근거를 확립한다. 따라서 '에이레네'는 마지 못해서 유지하는 결혼 생활의 불화에 대한 반대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죄가 의도한 정상에 대한 파괴 상태와 정반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만물의 건강한 상태, 정상적 상태를 함축한다. 당신이 배우자와 불화할 때 그를 구원하는 것이 당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해 보라. 구원과 그 결과인 화합의 복이 당신의 가정에 임할 것이다. 인간의 상호 간의 평화도 이 정상적 상태에 포함되어 있다. 다음 절(16절)은 '가르'로 시작한다. 여기서 '그러면, 그렇다면'이란 의미를 지닌다. : "(그렇다면) 아내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딤후 2:22은 확실히 우리가 내적 경건(신앙심)으로 평화를 조장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메타가 에이레네에 관계하지 않고 '…와 함께'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체 안에서 에이레네는 '구원을 가져 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당연하다. 한편 그것은 확실히 싸우고 있는 변론(제테세이스)을 한번 보지 않고 말하지 않는다(23절).
다음 구절들에서는 단순히 사람들 사이의 일치나 화합(concord)을 의미한다. 엡 4:3: "화평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약 3:18 :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의가 자라나는 씨는 화평케 하는 자들이 화평으로 뿌리게 되는 것이다. 시기(젤로스)와 다툼(에리데이아)은 '에이레네'의 정반대이다. 벧전 3:11에서 시 34편에서 인용하여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라는 말을 무슨 의미로 사용했는지 정확히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 의미는 아마도 일치와 화합(참조, 9절)일 것이다(참조: Foerster, TDNT).
6. 영혼의 평화로서의 에이레네
롬 15:13에서 이 단어는 영혼의 평화를 의미한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그러나 이 단어가 어떻게 이 의미를 취하게 되었는지를, 즉 정상적 상태에 대한 신약성경의 이 단어의 일반적 용법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평강의 하나님"이란 말이 외적 생명에 관한 의미를 함축하는 것과 같이, 그리고 에이레네가 인간의 전존재의 정상적 상태 - 카라(기쁨)와 불가분리적인 상태인 구원 - 을 인간 안에 창조하신다.
여기에서 에이레네의 개념은 스토아 철학의 소극적인 갈레네(고요함, 평온)와 다르다. 이 평화는 스토아 철학자들이 말하는 세상으로부터 은둔도 아니고 영적 세계나 신비적 명상에로의 경건한 도피도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삶을 살아가면서 영원을 찾을 때에 이미 하나님의 평화를 누리는 기쁨이 충만한 확신이다(참조: Foerster, TDNT; H.Beck, C.Brown, DNTT). 이러한 영혼의 평화는 히브리어 샬롬의 특징도 아니다. 따라서 이러한 평화는 독특하게 기독교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그리고 영혼 또는 마음의 평화에 관한 문맥들을 찾아 볼 수 있는데, 예를 들면 롬 8:6의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강"이라는 구절과 갈 5:22의 성령의 열매들 중 하나로서 "화평"은 이러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전자에서 에이레네는 생명인 구원을 뜻하고, 후자에서 사람들 간의 일치, 조화를 뜻하지만 내적, 영혼의 평화도 포함하고 있다(참조: 롬 14:17, [인간 상호 평화로서의 에이레네] 항목).
빌 4:7에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골 3:15에는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고 기록되어 있다. "평강", 하나님의 '구원하는 능력'이 다스리는 영역으로서 마음과 생각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이 구원하는 능력의 다스림을 받음으로 마음 또는 영혼이 평화를 누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참조: Walter Bauer; H.Beck; C.Brown; W.Foerster; G.Von.Rad).
(4) 오래 참음과
makroqumiva(3115, 마크로뒤미아)
인내, 오래참음 patience, for bearance.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마크로뒤미아(Menander 이래)는 마크로뒤모스(makroqumwv", 3116: 인내하는, 오래 참는)에서 유래했다.
(a) 이 단어는 '체념, 감수, 강제적인 수락'을 의미한다. 고통을 알지 못하는 신들의 행복과는 달리 인간에게 있어서 유일한 옵션은 마크로뒤미아 곧 체념이나 감수해야하는 인내이다(Menander).
(b) 이 단어는 '자포자기적인 인내'(Strabo)을 의미한다.
(c) 이 단어는 '지연, 지체, 행동을 연기하거나 미루는 것'(Artemid)를 의미한다.
(d) 이 단어는 '인내, 확고부동', 목적에 도달할 때까지 '참음'이라는 좋은 의미도 지니게 되었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마크로뒤미아는 70인역본에서 5회 나오며, '오래참음'(잠 25:15; 렘 15:15), '견딤, 확고부동' 등, 특히 고난과 재난을 참는데서 보이는 것 같은 것(사 57:15; 마카베오일서 8:4)을 나타낸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마크로뒤미아는 신약성경에서 14회 나오며, 바울 서신에 10회,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전서, 베드로후서에 각각 1회 사용되었다.
(a)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바울은 하나님의 오래참음을 그의 진노와 관련시킨다.
① 롬 2: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② 롬 9:22,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하나님의 진노는 이미 명백히 나타났지만 오직 진노의 날에만 절정에 달할 것이다(참조: 롬 2:5). 오래참으심은 분명히 우유부단이나 굴종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감정에 의해 동요되지 않으며 의도적 목표를 가지고 있다. 지체는 회개의 시간을 허락할 수 있지만 또한 진노를 증가시킨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요구의 여지를 전혀 남겨 놓지 않으며 단지 그것의 종말론적 차원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분명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 목표가 오직 소극적인 것만은 아니다. 이는 진노의 그릇들 조차도 자비의 그릇들에서 보이는 하나님의 자비를 선명하게 해주는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b) 그리스도인의 오래 참음.
하나님의 오래참음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유사한 오래참음을 가지도록 요구한다(참조: 살전 5:14).
① 갈 5:22에서 오래 참음은 사랑에 의해 지배되는 성령의 열매로서 결국 상호간의 보정(補正)이 된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② 고후 6:6에서 오래 참음은 하나님을 섬기는데 필요한 자질이며 지식과 친절을 연결해 준다: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③ 골 1:11에서 오래 참음은 하나님의 영광에 그 기원을 둔, 그리고 즐거운 감내로 자체를 완성하는 하나의 영적 힘이다: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④ 골 3:12 이하에서 택함받은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들의 새 의복으로서 오래 참음을 입는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⑤ 엡 4:2에서 오래 참음은 그리스도의 한 몸에로의 그들의 소명에 부합한다(참조: 엡 4:1 이하):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⑥ 딤전 1:16에서 그리스도께서 친히 바울을 향하여 오래 참음을 발휘하신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와 같이 하여 그는 대적자들을 대함에 있어서 우리를 위한 하나의 모본을 제공하신다. 아무도 쉽게 포기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오래 참음은 자연적으로 찬양에 이른다(딤전 1:17).
⑦ 딤후 3:10에서 오래참음은 선교 사역에서 의무적인 것으로 부과된다: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⑧ 딤후 4:2에서 오류와 맞서는 최선의 길은 오래참음에 의한 것이며 이것은 한편으로 후퇴하지 않으면서 온갖 신뢰로 신적 재판관에게 판결을 맡기는 것이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⑨ 약 5:7 이하에서 부당한 고난을 당함에 있어서 마크로뒤미아는 그리스도의 강림을 기다리는 오래참음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그리스도의 가까우심에 대한 인식은 분노의 감정을 끄며 승리적 확고부동함을 낳고 열매의 확실성을 부여한다.
⑩ 히 6:12(참조: 히 6:11-히 6:12)에서 강조점은 믿음과의 관련성에 놓여 있다: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마크로뒤미아는 기다림에 의해 초조해지지 않는 믿음과 소망의 확고부동성이다. 그것의 기초는 의로우신 하나님의 약속이다.
⑪ 벧전 3:20 이하: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명 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여기에서 노아의 시대에 하나님의 오래참음은, 구원과 멸망으로 나타날 순종과 불순종의 진전을 고려에 넣고 있다. 그것은 오늘날 선포와 세례(세례)를 통한 그리스도의 사역에 의해 특색을 이루고 있다.
⑫ 베드로후서에서는 하나님의 마크로뒤미아가 중심 개념이다. 이것은 파류샤(재림)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해 준다(참조: 벧후 3:4). 그것의 목적은 전적으로 적극적인 것, 즉 회개의 기간을 허락해 주는 것이다. 심판은 마침내 악인들 위에 떨어질 것이다(참조: 벧후 3:7).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흠없이 발견되도록 열심을 내야 한다(참조: 벧후 3:14). 그렇지만 우리는 주의 오래참으심을 구원으로 여겨야 한다: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벧후 3:15).
이 단어는 여러 비문에서 통치자들과 중요한 공적 인물들을 위한 영예로운 칭호로 사용되었다.
2. 70인역본의 용법
크레스토테스는 70인역본에서 약18회 나오며, 히브리어 토스 어군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크레스토테스는 사랑의 '선이나 의'를 표현하며(시 14:1; 시 14:3; 시 53:3), 하나님의 자비 및 친절한 성품과 행위를 나타낸다(시 25:7이하; 시 31:19; 시 65:11등).
3. 신약성경의 용법
크레스토테스는 신약성경에서 10회, 바울서신에만 나타난다.
(a) 롬3:12에서 크레스토테스는 인간의 '선이나 의'를 의미한다: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이 구절은 시 14:1을 인용한 것이다.
(b) 크레스토테스는 롬 2:4에서 그리스도 앞에서, 롬 11:22에서 그리스도 안에서와 통해서 나타난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태도와 행위를 의미한다.
딛 3:4이하에서 크레스토테스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완성을 이루는 하나님의 친절(자비)을 표현한다.
엡 2: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신적 구원 활동의 특수한 궁극성을 체험한다. 그것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하늘의 영역으로 옮김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서 활동해 온 그분의 은혜와 친절하심(자비)에 대한 계시이다. '온유함, 친절함'을 뜻하는 크레스토테스는 여러 단계로 이루어져 있는 하나님의 운동 원인들 가운데 하나의 새로운 동인이다. 공동체가 비밀로서 소유하고 있는 것, 그리스도는 속량하시는 우주의 지배자라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을 통해 공동체 안에서 현실로된 것은 마땅히 드러나야 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공동체 속에서 활동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시는 공동체를 경유하고 통과하여 전해지며, 앞으로 올 세대까지 확대된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통치를 전제로 삼는 신자들의 부활과 통치자적 지위는 앞으로 올 세대에서 밝혀져야 하고 드러나야 한다(Joachim Gnilka).
(c) 크레스토테스는 덕목 중의 하나로 사용되었다. 그리스도 안에 나타났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밖으로 퍼져나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체험은 그 자체로서 이제는 다른 사람을 향한 크레스토테스로 작용한다.
갈 5:22에서 크레스토테스는 성령의 열매이며, 고후 6:6에서는 성령과 관련되어 있다.
골 3:12에서는 이와 유사한 주님의 성품에 크레스토테스가 근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친절(자비)은 아가페의 직접적인 외관적인 활동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에 의해 인도되는 사람의 삶 속에서 항상 살아있고, 능동적이며, 자발적으로 생겨나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셨고, 스스로 백성을 선별하셨으며, 죄와 사악함에도 불구하고, 때가 찰 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무한한 인자함을 나타내 보이셔서 죄와 사악에도 불구하고 계속 인자함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원초적인 자비하심으로부터의 순환을 완성한다. 여기서 비로소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그 목적 Goal을 달성하게 된다. 하나님의 자애로운 아버지와 같은 자비로움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울을 보듯 분명히 볼 수 있다. 더욱이, 기독교 공동체, 즉 교회의 구성원들은 반드시 그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자비의 길을 자신들의 소명으로 삼지 않으면 안된다. 동시에, 그들은 그러한 자비의 징표를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세상에서 인자함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된다.
(참조: J.H.Thayer; K.Weiss; E.Beyreuther).
(6) 선함과
ajgaqwsuvnh(19, 아가도쉬네)
선함 goodness.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아가도쉬네(Thom.)는 아가도스(ajgaqov", 18)에서 유래했으며, '선함 good'을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아가도쉬네는 70인역본에서 약 16회 나오며, 느 9:25, 느 9:35에서 튜브를 번역하여 '번영'을 나타내며, 시 38:20; 시 52:3에서 토브를 번역하여 '선'을, 삿 8:35; 전 4:8; 전 5:10; 전 6:3, 전 6:6에서 토바를 번역하여 '선함이나 낙 또는 만족'을 나타낸다.
3. 신약성경의 용법
아가도쉬네는 신약성경에서 4회 나온다. 선한 사람이 가지는 자질 뿐만 아니라 도덕적 탁월함을 가리킨다.
(a) 갈 5:22에서 성령의 열매이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b) 엡 5:9에서 의로움과 진실함과 함께 빛의 열매에 속한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c) 롬 15:14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이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살후 1:11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참조: Walter Bauer; W.Grundmann).
(7) 충성과,
pivsti"(4102, 피스티스)
믿음 faith.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a) 명사 피스티스(Hes., Hdt.이래)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1) 피스티스는 '신뢰, 확신, 확실성, 확고한 확신'을 의미한다.
(2) 피스티스는 사람이 가지는 확신 뿐만 아니라 사람이 향유하는 확신, 즉 '신뢰할 수 있음, 의지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차이가 있을지라도 확실성이나 신뢰성과 관련되어 있다.
(3) 피스티스는 신뢰의 가능성, 의지할 수 있는 것을 보장하는 '보증, 증명, 증거, 신실성'을 의미한다.
(b) ① 원래 피스티스 어군은 '계약이나 약정을 존중하는 행동'을 나타내었다. 이 어근은 그 기원이 사회에서 유래한 어군이며, 암시적으로 '부정행위, 위법행위'를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 휴전을 하기 위해서는 신실성을 보장하는 계약을 맺는 것이 필요하였다(Hom., II ., 2, 124; 호르키아 피스타). 기대에 어긋나는 신뢰는 비난을 받게 된다. '여인들에게는 신뢰할 만한 것이 전혀 없다'(Hom., 0d.,11, 456). 성실성은 위기에 처했을 때 드러난다. 따라서 신실함과 불신함에 대한 경험은 처음부터 믿음이라는 개념에 속하는 것이다.
② 이 개념은 매우 초기부터 종교적인 어조를 띠고 있었다. 신들은 동맹이나 약정에 대한 보증이 되었다 (Hom., II., 2, 115 ff.; 맹세의 중요성에 유의하라). 이 단어들은 신탁(oracle)의 신뢰성에 대한 경우에는 직접 신에게 적응되기도 한다. 피스티스 어군은 위협적인 위험에 직면할 때 구원해 주는 신들의 능력(Aesch., Sept., 211 이하 ),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주권(sovereignty, '하나님의 말을 듣고 순종하지 않는 자는 정신이 나간 자이다'. Eur., Iph, Taur.,14,75f.), 그리고 사람의 운명을 인간의 뜻과는 반대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권능(Soph. , OT,1445)에 대한 문제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러한 경우에는 신의 뜻에 대한 무조건적 순종이 인간에게 요구된다.
③ 아그리겐툼 (Agrigentum)의 엠페도클레스(Empedocles )는 광신적인 신앙에서 믿음(faith)에 대한 독특한 표현을 하였다. 그는 구원의 길을 지적해 주며(Frag.112), 신의 계시, 곧 그의 우주론과 윤회(metempsychosis)에 관한 가르침에 동의한다는 의미의 믿음을 요구하는(Frag. 114 이하) 불사의 신으로 나타났다. 권위적으로 선언된 이 계시에 대한 믿음과 인정은 동일한 것이었다(Frag.4, 5). 주전 350 년과 300년 사이에 이 어군이 현재 형태를 받아들여 쓰여진 에피다우루스(Epidaurus)의 아스클레피우스(Asclepius) 성전의 비문들은 고전 시대 말기에 속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특별히 신의 기적적인 능력에 대한 밀음이 요구된다(참조 : R.Herzog, Die Wunderheilungen von Epidauros, 1931).
(c) ① 헬레니즘 시기의 회의론과 무신론이 서로 충돌하는 동안에 피스티스는 신들의 존재와 행위에 대한 '신념' conviction이라는 의미를 획득하게 되었다. 이 의미는 과거의 노미조 ( ~라고 여기다 deem, ∼라고 생각하다 hold, ~라는 것을 믿다 believe that; 참조: Plat ., De Superstitione,11; Pericles, 32; Amatorius, 13)의 의미를 계승한 것이다. 이제는 교훈적인 요소가 일반적이며 기본적인 의미로 나타났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인 피스티스가 이론적으로 '신념' conviction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러나 생활이 이 신념에 따라 구성된다는 신앙에 강조점을 두었다. 이러한 범위까지 피스티스는 과거의 유세베이아(경건 piety, 참조: Plut., De sera numinisvindicta, 3; De Pythiae Oraculis, 18)의 실제적인 특징들을 취하기도 한다. 눈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물질 세계와 영적 세계 사이의 긴장은 마찬가지로 그 배후에 토론의 명확한 자취를 남겼다. 그 결과 믿음이라는 것은 물질화된 개념이 되었는데 이 물질화된 믿음의 개념은 철학적으로 신플라톤주의의 명백한 이론체계에서 전통에 의해 계약된 한정되고 지적인 신념을 요하는 개념이었다( Plotinus, Enneads, 1, 3, 3; 5, 8, 11; Porphyry, Ad M-arcellam, 21 ff.).
② 피스티스에 대한 스토아 학파의 이해는 특히 중요하다. 스토아 철학의 철학자는 세계에 나타난 신의 질서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자율적이며 도덕적 인간인 자기 자신이고 중심이라고 표현하였다( Epict., 2,14,11-13). 피스티스는 인간의 본질을 드러낸다(Epict., 2, 4, 1). 자신의 도덕적 운명에 대한 인간의 신실성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신실함에 이르게 된다 (Epict., 2,4,1-3;2,22).
③ 여러 신비 종교들에게 믿음은 신의 훈계와 가르침을 따름으로 또한 자신을 신의 보호에 맡김으로써 신에게 위탁하는 것을 의미한다(Apul.,Met ., 11, 25-28; P.0xy., 11, 1380,152). 주후 2세기와 3세기의 혼합종교적이며 플라톤적인 계시인 Corpus Hermeticum 에서 나오는 믿음은 지식 Knowledge의 보다 더 높은 형태이다. 따라서 믿음은 누스(이성 Reason, 마음Mind)의 영역에 속한다. 인간은 그의 영이 믿음의 지식에 안주하게 될 때까지 신비로운 방법으로 로고스(Logos)의 영역 밖으로 인도된다. 그리하여 그는 신성에 참여하는 것이다 (Corp. Herm., 9, 10; Ascl.29). 유대교와 기독교 뿐만 아니라 신비 종교에는 이들 종교가 신봉하는 신을 믿으라는 믿음에 대한 요구와 그 신들이 해준 계시(예: 이시스 Isis]와 오시리스 Csiris의 숭배)와 가르침이 두드러진다. 이런 방식으로 구원(신비 종교들에서 구원은 신성화 divinization와 동일시 되었다)이 신자에게 약속되었다. 계시에 대한 특수한 주장을 갖고 나타나 기독교에 다른 길을 제시한 '하나님의 아들들'(참조: hyios)은 아마도 유대교와 기독교의 배경에 속하는 듯하다. 모든 종교는 그 방법에 있어서 동일한 것을 요구하고 있다. '만일 네가 구원을 받고자 한다면 믿으라, 그렇지 않으면 썩 가거라'(Origen, Contra Cels,6, 11).
(d) 이와 같이 일반 헬라어에서 이 어군은 넓은 개념 범위를 나타낸다. 이 어군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는데 사용되며, 또한 인간과 신과의 관계를 표현하는 데에도 사용된다. 이 어근의 특별한 의미는 당시에 유행한 철학적, 종교적 영향들에 의해 결정된다. 원래 이 어군은 계약과 의무들과 관계 가있었다. 그러나 스토아 철학은 이론적으로 근거가 있는 생활 법칙을 여기서 만들어내었는데 이 생활 법칙은 개인을 우주와 조화시키는 법칙이다. 피스티스가 어떠한 통제도 받지 않는 계시에 대한 응답으로 요구되는 위험한 발전도 있었다. - O.MICHEL.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피스티스는 70인역본에서 약 55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에무나(경고, 충실, 성실, 확고부동의 믿음)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에메트, 아만, 에문, 아마나의 역어로도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피스티스는 신약성경에서 약 230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피스티스는 '신실성, 신뢰성'을 의미한다: 마 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롬 3:3, 딛 2:10, 갈 5:22, 살후 1:4.
[참고 - 신약성서에서 피스티스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인간에게 제시된 요구는 당시에 존재한 의식적 경건과 랍비식 가르침의 포기를 수반하다. 이것은 또한 헬라 세계에 초기 기독교 전도의 특징이기도 하였다(R. Bultmann, TDNT Ⅵ 203ff,208f.).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 기독교 전승에는 간과할 수 없는 몇 단계가 있다. 세례 요한의 설교는 단호한 일면을 가진 회개를 중심에 둔 설교였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 가장 초기 설교는 또한 회개의 요구에 대한 것이었다(마 3:2; 마 14:17). 요한에 관한 구절들에서 믿음의 요구를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참조 : A.Schlatter, Der Evangelist Matthaus, 1963, 52-85; 관련참고 문헌도 참조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가상적 안전에 대한 그의 태도는(마 3:9) 아만과 잘못된 바타흐 간의 긴장을 상기시킨다. 더우기 세례 요한의 사역은 그 사역의 타당성에 대한 의문을 야기시키므로 따라서 믿음에 대한 의문도 야기시킨다(마 21:25, 마 21:32이 명백함). 그러나 믿음에 대한 모든 암시적 요소들에도 불구하고 쿰란이나 세례 요한이나, 또한 고대 열심 운동들(zealot move-ments)까지도 믿음에 대한 어떤 요구를 하지 못했다. 부활절 후 오직 초기 기독교 설교의 상황에서 만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는 이 강령이 발전하게 되었다. 복음은 모든 듣는 자들이 받아들인 합법적으로 주장하는 확고한 교훈의 전승이 되었다. 세례 요한의 설교에서 회개하라는 요구는 헬라 기독교 전승의 믿음의 설교에 채택되었다. 다음의 개관에서 검토되어야 할 바가 바로 이 발전이다.
피스티스/피스튜오 어군에 대한 신약성서의 용법은 첫번째 예에서는 구약성서와 유대 전승의 더 진보된 발전과 이에 대한 특수한 문제들을 포함한다. 선교 어휘에서 피스튜오 에이스( ~을 믿다 believe in, 예: 갈 2:16; 요 1:12; 요 3:18)가 빈번히 사용되는 것은 일반 헬라어와 70인 역본에서 아주 벗어나는 것이다. 예수님의 역사에 있어서 특별한 사건들(살전 4:14; 롬 10:9), 기독론적인 문장(요 20:31)과 믿음을 연관시키는 호티(hoti)문장들(...을 믿다 believe that...)은 헬라 교회의 언어 용법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다. 이 문장들은 특별한 역사적 내용을 기독론적 고백에 결합시킨다. "죽은 행실을 회개함 "과 "하나님을 믿는 믿음 "은 초기 기독교 교리 문답의 교육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들이 었다(히 6:1). 더욱 중요한 것은 바울의 신학적인 문맥에서 기독교의 선포 Proclamation를 받아들임과 복음에 의해 이끌어 내어지는 구원의 믿음을 나타내는데 피스티스가 명백히 사용된다는 것이다(롬 1:8; 살전 1:8). 바울에게 있어서 피스티스는 전도와 불가분리적으로 결합된 것이다. 초대 기독교의 선교 설교는 이와 같이 믿음에 선명하게 초점을 맞추었다.
(a) 예수님과 공관복음.
기적 기사들은 종종 병든 자 또는 병자 주위 사람들의 믿음에 대한 언급을 싣고 있다(막 2:5; 막 5:34; 막 5:36; 막 10:52; 마 8:10). 그 의도하는 바는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믿음과 고통으로부터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다. 이러한 구원의 행동들은 예수님의 임무인 봉사로 수행되며 기존 믿음을 확증하기 위해 의도된 것이다. 믿음에 대한 문제는 분명히 이러한 기적 기사들과 연관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육체의 질병으로부터 구원하시고자 하신 것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자신의 구원의 역사의 증인들로 삼고자 하셨다. 이것은 예수님이 행동하실 조건을 이루는 요소는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육체적 치유 과정을 초월하여 있는 목표에 관심을 두었다. 예수님의 의도하시는 바는 단순하게 '치유자'가 되려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도우는 자'가 되려 하시는 것이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요구하시기 보다는 믿음을 구(求)하는데 더 관심을 가지셨다. 인간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역사를 행하실 수 있는 가능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곧 이것은 후에 헬라 교회에 의해 선포되어야 했던 바의 시작이요 첫 걸음일 뿐이다.
막 6:5 이하는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에서의 반대 기사를 싣고 있다. 불신이 매우 강해서 예수님께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수 없으셨다. 예수님께서는 계속 수많은 병든 자들을 고쳐 주셨다. 만일 예수님의 구원의 역사가 믿음과 연관되었다면 불신은 예수님과의 충돌을 야기시켰을 것이다. 복음서 기자들은 나사렛 사람들의 불신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곳에서 "권능"을 행하시는 것이 절대로 불가능하였다는 인상을 전하고자 의도한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관한 기사들은 기적들이 일어난 특별한 상황을 초월하는 것으로 보이는 여러 말씀들을 싣고 있다(막 9:23; 막 1:22 이하; 눅 17:5 이하; 마 17:20). 믿음에 대한 이 말씀들의 독특한 특징은 이 말씀들이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신자에게 제시되며 또한 예수님께서 명백하게 이 무한한 믿음으로 제자들을 부르셨다는 사실에 있다. 랍비 교훈들과 모두 외적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이 말씀들은 전승과는 분리되어 존재한다. 이 말씀들의 강조적이며 신앙 고백적인 어조는 즉시 나타난다. 예수님 자신도 믿음으로 생활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가능성들에 복종하셨고 또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범을 따르도록 격려하셨다(참조: J.Schniewind, Das Evangellium nach Markus,(1931) 1968, 120). 산을 옮기고(막 11:23) 뽕나무 뿌리를 뽑는( 눅 17:6) 믿음에 대한 묘사들은 창조의 질서를 변형시킬 수 있는 권능의 말씀을 입증한다. 막 11:24 이하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교훈은 이 가르치심에 있어서 권능의 말씀에 존재하는 약속과 간구 간의 연관성을 보여준다. 간구는 권능의 말씀의 전제 조건이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예수님께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제시하시는 가능성들에 대해 문을 여는 것을 의미한다(참조: 막 11:22; 에케 테 피스틴 데우, 하나님을 믿으라have faith in God). 그것은 또한, 하나님은 주어진 상황과 이미 발생한 사건들에 단순히 만족하지 아니하신다는 사실에 대한 고려도 포함한다. 에케인 피스틴 데우(하나님을 믿으라 have faith inGod, 막 11:22)와 프로스티데나이 피스틴(믿음을 더하소서 increase faith, 눅 17:5)과 같은 표현들은 믿음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그 후에 어떻게 이해되었는가를 보여준다. 거기에는 하나님이나 또는 예수님을 믿는 특별한 종류의 믿음이 있었다. 작은 것과 큰 것의 대조(눅 17:6; 마 17:20)는 인간의 마음가짐과 약속의 웅대함 간의 대조를 나타낸다. 인간에게서 일어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웅대함과 비교할 때 작은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것처럼 무한한 믿음에 대해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존재하는 바를 주장하셨던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주장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무모한 열심주의와는 전혀 달랐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씨름, 또한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대화와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믿음(히브리어 빗타혼)과 지식(다아트)의 범위 내에 속하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개인들에게로 향하셨다. 왜냐하면 그의 백성 전체에게 믿음의 결단을 하라고 권유했기 때문이었다(눅 18:42). 공관복음서의 전승에 나오는 믿음에 대한 진술들은 항상 제한되어 있다. 우리는 여기서 후기의 영향들을 보기도 한다(구원의 메시지의 받아들임에 비추어 명령법 메타노에이테을 참조하라). 그러나 예수님의 모든 부르심과 말씀이 믿음과 신뢰와 지식과 결단과 순종과 자기 방향등의 여러 요소를 포함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예수님의 설교는 믿음(faith, 히브리어, 에무나)과 신뢰(trust, 히브리어, 빗타혼)의 여러 면들과 별도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예수님의 믿음은 실재를 지향했고 삶의 행위에 깊이 연루되었으며 가정적 추상과는 완전히 다른 수준에 존재하였다.
(b) 바울과 바울의 전승.
바울의 가르침은 팔레스타인 유대인 교회와 헬라 교회에 대한 가르침이 계속 이어진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부활하신 주님에 의한 그의 소명으로 말미암아 교회들에 의해 야기된 특별한 문제들과 고투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독자들을 "믿는 자들"(호이 피스튜온테스, 롬 1:16; 롬 3:22; 롬 4:11; 고전 1:21)로 칭한다. 그들의 하나님께로 전환한 것이 "믿는다"(피스튜에인, 고전15:2; 고전 15:11)로 묘사된다. "믿음"은 구원의 메세지와 복음에 근거한 행위를 받아들임을 의미한다(헤 피스티스, 롬 1:8; 고전 2:5; 고전 15:14; 고전 15:17). 그것은 명백하게 예수님의 십자가 Cross 와 부활 Resurrection 에 기초한 구원의 믿음이다(고전 15:3-4; 고전 15:11). 이 독특한 사건은 모든 신학적 생명과 기독교인의 행위의 모든 국면을 결정하는 하나님께서 규정하신 척도이다. 이것은 유대인들과 또한 유대교와의 논쟁에 의해 나타난다. 이 둘은 모두 옛 언약 Covenant 과 율법 Law의 정당성에서 출발하였으나 종말론적 실존이라는 점을 오해하였다. 이것은 또한 미래와 종말론을 잘못 해석한 헬라어 열심주의와 영지주의와의 싸움에 의해서도 나타난다. 믿음에 의해(에크 피스테오스, 디아 피스테오스, 에이스 피스틴: 믿음의 of faith, 믿음으로 말미암아 through faith, 믿음 안에서 in faith) 받은 의 Righteousness는 은혜 Grace의 선물이다. 이것은 모든 인간적인 자랑을 부정하며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율법을 행함에 의거하고자 하는 어떠한 시도도 훼파한다(갈 3:10 이하, 갈 3:23 이하; 롬 3:27-31). 새 언약 Covenant은 그 역사적인 형태와 동시에 인간에 대한 그 효력에 있어서 옛 언약을 폐지한다(갈 3:23 이하; 갈 4:21-31; 고후 3:6). 믿음은 아브라함의 소명에서 예견되었던 종말론적 구원 사건을 인정하며(롬 4:9 이하; 갈 3:17 이하 ) 그 목표를 이방인 선교에서 발견한다(롬 4:17 이하; 갈 3:26-29). 세례와 성령의 은사에 대한 이론적인 이해에 근거를 두었던 헬라의 열심주의, 또한 영지주의와의 논쟁에서 바울은 역사적인 사실들과 또한 자신의 종말론적 목표를 강조하였다(고후 5:7). 믿음이 신뢰(trust, 히브리어, 바타흐)뿐만이 아니라 지속적 요소(히브리어 아만)까지도 포함하므로 소망에 속하기도 한다(롬 8:24; 고전 13:13).
특별히 중요한 것은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를 함께 연결시키는 바울의 가르침의 방법이다(살전 3:5; 살전 3:8; 고전 13:13; 골 1:4 이하). 헬라의 미덕들을 받아들이라는 것이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사항이 아니다. 믿음, 소망, 사랑은 케뤼그마(kerygma)에서 끌어내어진 기독교인의 생활의 다양한 국면들로써 교회 생활의 기초를 형성하는 것이다. 비기독교적인 덕목들이 바울이 주장하는 세가지 사항의 이면에서 추적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의문스럽다(그러나 Porphyry의 Ad Marcellam에 나오는 16가지의 덕목을 참조하라). 만일 영지주의자들이 '덕목들'을 소유하고자 한다면 바울의 세가지 사항의 비이론적 특징은 무엇보다 인상적일 것이다. 변형한 종말론적 기대는 차이점이 드러나니, 곧 믿음과 소망 Hope은 완성에 이르고 오직 사랑 Love만이 새 영겁(newaeon)를 결정짓는다(고전 13:13; 시간, 아이온). 바울의 세가지 사항은 카리스마적 은사들로 간주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후자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은혜 Grace, 카리스). 이 세 가지는 복음에 실제로 적응되는 것이며 또한 교회의 구성원들 모두 예외 없이 져야하는 의무이다. 카리스마적인 은사들은 바울이 설명하는 세가지 사항과는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한편 바울은 성령에 대한 교의에서 은사들의 충만을 나타내고자 하는 노력 때문에 믿음을 다른 사항들과 나란히 은사에 포함시키게 된다(고전 12:9). 이 곳에서 의도되는 바가 믿음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산을 옮길 수 있는 '모든 믿음'도 아마 아닌 듯하다(고전 13:2).
분명한 것은 믿음이 그 전에 언급된 '지혜의 말씀', 그리고 '지식의 말씀'과 구별된다는 것 이다.
볼 수 없는(타 메 블레포메나)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 사이에 하나의 긴장 상태가 존재한다. 이것은 우리 마음대로 미래를 소유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사람이 가까이 할 수 있는 것과 하나님께서만이 가까이 할 수 있는 것 간에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고후4:18; 고후 5:7). 보이지 않는 것은 플라톤의 비물질적 세계가 아니라 믿음과 신뢰 안에서 인지되는 기독교인의 목표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Cross는 항상 율법주의(갈 2:21)와 이론적인 지혜(고전 1:17)에 대항하는 공격의 촛점이다. 부활은 세례를 통한 새로운 실존의 은사로 나아가는 길을 연다(롬 6:4; 고후 5:17).
갈 5:6은 고정적 문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참조: 갈 6:15; 고전 7:19)를 제시한다. 세례를 통해 이전의 모든 차이들을 초월하는 새로운 법이 효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이 법의 요구들에서 표현된 하나님의 뜻은 사랑에서 그 종말론적 성취를 발견한다. 바울이 엄중하게 강조하는 이 해결책은 믿음을 종말론적 변형에 관련시킨다. 따라서 이 믿음은 바울의 성령에 대한 교리와 직접적으로 일치한다. 믿음과 성령의 은사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은 세례로 함께 모아졌다.
바울의 가르침의 또 한가지 중요한 면은 직설법과 명령법 사이의 긴장 관계에 의해 특징지워진 믿음의 생활에 대한 그의 이해이다(참조: R. Bultmann,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1, 1952, 332f.). 세례를 받고 의롭다함을 받은 신자는 자신이 영 Spirit과 육체(Flesh)사이에서 투쟁하고 있음을 발견한다(롬 8:4 이하; 갈 5:16 이하). 그는 성령의 일들을 회피하지 말라는 요구를 받는다. 성령의 일들에 대한 순종이 없이 믿음은 이 투쟁에 필요한 능력을 얻지 못한다.
믿음이 '약하다'는 개념(롬 14:1)은 특별한 논의를 도입하는 것이다. 이것은 비판을 하는 것과 연결된다. 바울은 비판을 피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은 믿음 안에서의 성장(고후 10:15), 믿음 안에서 견고함(고전 15:58), 그리고 자신의 태도가 믿음으로부터 솟아나는가 하는 것에 대한 자기 비판적 심사숙고와 같은 일이기 때문이다(롬 14:23의 중요 진술을 참조하라). 이 모든 권면들은 어떻게 믿음이 비판에 드러내어질 뿐만 아니라 반복적으로 이 비판에 자신을 종속시키는가 하는 것을 준엄하게 보여준다. 복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그 궁극적인 표현과 기초를 찾는다는 사실은 믿음이 이 척도에 의해 계속적으로 스스로를 측정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믿음은 수정과 자기 수정을 수반하는 동적인 활동이다. 이 점에 있어서도 이 상황은 성령의 교의와 일치한다.
엡 4:3은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을 계속 유지할 것을 요구한다. 이 권면은 후에 중대하다고 판명되어야 하는 하나의 방향으로 이동한다. 여러 집단들의 다양성과 견해의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사도 이후의 전승은 일반적인 관점을 지속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엡 4:5은 "한 주"와 "한 세례"와 함께 "한 믿음" 마치 이 세가지가 세례 행위를 반영하는 것처럼 말한다.세례가 주는 일반적인 관점은 하나의 목표로 지향된 하나의 과정이라는 것이다(엡 4:13). 이것은 그리스도 자신에 의해 인도된다.
(c) 요한의 교의
히브리서에 나오는 바와 같이 이곳에서도 동사가 정면에 나온다. 명사는 서신들과(요일 5:4) 요한계시록에(계 2:13, 계 2:19; 계 13:10; 계 14:12) 간혹 발견될 뿐이다. 형용사 피스토스(pistov", 4103,반대어는 아피스토스)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증거자들과 교회에 사용되기도 한다(계 1:5; 계 2:10; 요일 1:9). 셈어적 사고와의 연결은 특히 계시록에 명백하다. 믿음, 그리고 믿음의 행동은 충실의 특성을 띠고 있다. 요한계시록도 믿음의 자질들과 활동들에 대한 교훈적 목록들을 싣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행위"(에르가)가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계 2:2, 계 2:19). 이 곳에서 피스티스는 충성의 동기와 밀접하다(계 2:19). 요한의 교의에 의해 인정받는 증거를 귀감으로 삼고 또한 이 증거에 의해 형성되어야 한다는 것이 기본이다. 이 증거는 복음에 있어서도 중요한 것인데 복음서에서 증거는 역사적 증거에 의거한 것이다.
이러한 사고 형태들은 신약성서에 나오는 그 밖의 사고 형태들과 차이가 있다. 믿음은 하나님에 의해 인증된 증거에 기인하는 것으로 이 증거에는 표적들도 한 역할을 담당한다. 이 증거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진다(요 1:7). 참되고 진실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이것이 하나님에 의해 인증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따라서 진리에 속한 자는 하나님의 이 요구를 듣는다(요 18:37). 믿음과 지식(요 6:69), 지식과 믿음(요 17:8; 요일 4:6)은 각각 다른 두개의 과정이 아니라 다른 입장에서 증거를 받아들였음을 뜻하는 교훈적인 동등 어구이다. 증거를 받아들이는 믿음 만이 지식을 소유하니 진리를 아는 자는 믿음에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지식과 믿음의 이 통합 관계는 반(反) 영지주의, 반(反) 사변적이다. 듣는 자는 이 두가지가 모두 구원에 수반된다는 것을 이해할 것이니 곧 증거에 따르는 개인적 응답과 개심 뿐만이 아니라 증거를 받아들이는 것까지도 구원에 수반되는 것이다. 요 4:42의 구별은 중요하다.
믿음과 생명은 밀접하게 연관된다. 아들을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는 약속을 소유한다(요 3:16이하; 요 11:25). 이 약속은 이미 현재에 성취 Fulfilment됨을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께 대한 세상의 적의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이것은 하나님에 의해 보내심을 받은 분께 대한 반발이다(요 3:20; 요 7:7; 요 15:18, 요 15:23). 제자들까지도 이 적의에 빠진다. 신자는 이 적의의 원동력이 되는 능력에 더 이상 지배받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찾음으로 인해 세상과의 이 투쟁을 감당할 수 있다(요일 2:15 이하 ). 신자와 이 세상과의 긴장 관계는 따라서 사변적인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비록 신자들이 보지는 못했을지라도 그들에게 선포된 축복은 부활절 전승에 의해 야기된 복합적인 문제에 속한다. 이것은 공관복음서들이 고수하는 사도적 부활절 전승에 대한 비평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후 세대들에게 부활절의 기쁨에 동일하게 접근하는 것을 허락해 준다. 불트만(R.Bultmann)은 반대적인 견해를 취한다.(The Gospel of Tohn 1971, 696).
최초의 구원사건은 과거에 속한 것이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요 20:29)와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도다"(벧전 1:8). 이 두 가지 말씀이 전달되는 각 새로운 세대와 함께 일련의 새로운 문제들이 야기된다. 벧전 1:8의 예수님에 대한 이중 적용은("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고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요한의 전승과 연관성이 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여러 헬라적 상황에서 믿음과 사랑이 함께 제시된 권면들은 후기에 나오는 것이다(참조: 딤전 2:15; 딤전 4:12; 딤전 6:11; 딤후 2:22). 그러나 여기에서도 우리는 헬라의 미덕들의 단순한 도용(appropriation)을 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권면들은 세례에 대한 가르침에서 발전된 생활의 새로운 상황들을 위한 더 진보된 교훈임을 나타낸다.
(d) 신약성서의 나머지 부분에서의 믿음에 대한 이해.
사도행전의 언어 사용은 종종 선교 용어에서 나온 통상적인 문구와 표현들임을 나타낸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게 되거나(행 16:34) 또는 주를 믿게 된다(행 5:14; 행 18:8). 믿음에 대한 권면은 종말론적 구원의 약속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기독교계에는 "기록된 것"에 대한 새로운 믿음도 있었다(행 24:14; 행 26:27). 곧 유대의 헬라식 경건과 유사하게 구원사를 보는 방법이 생겨났다(딤후 1:5에 표현된 연속성을 참조하라). 히브리서는 전승에 대한 독자적인 가르침을 제시한다. 즉 히브리서는 구약성서의 주요 골자들을 광범위하게 사용하여 족장들의 역사를 피스티스(pivsti", 4102) 어군과 연관시켜 묘사한다. 히브리서는 권면에서 믿음의 약속과 불신에 대한 경고를 사용한다(히 10:37 이하=합 12:3 이하). 무엇보다도 히브리서 11:1은 구약성서의 주제와 헬라적인 주제들을 결합시킨 교훈적 정의를 제시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이 말은 믿음의 모든 요소들을 포괄적으로 요약한 것이 아니라 박해 하에 있는 교회를 위해 믿음의 중요한 요소들을 포괄적으로 요약한 것으로, 즉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인 것이다. 미래와 시야에서 감추어진 것은 이 곳에서 밀접하게 연결된다. 이 정의는 11장의 족장들의 역사에 대한 개관과 12:1-11의 신약교회에 대한 묘사를 도입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믿음의 선구자이며 완성자"로 나타나신다(히 12:2). 그는 하나님에 의해 완전하게 되셨으며 이제는 완전을 위한 투쟁을 끝맺으실 수 있는 분이시다. 약속을 받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백성은 믿음에 근거하여 행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다음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약속된 목적지이다. 따라서 현재 이곳과 헬라 전통의 특징인 내세 간의 긴장 관계가 새롭게 표현되어 있다.
바울 사상의 본질이 목회 서신들에서 다시 나타난다. 그러나 이것은 무모한 열광주의와 영지주의적 거짓 교훈에 반대하는 내용으로 재진술되어 있다. 딤전 1:5은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 어늘"이라는 논제를 제시한다. 열광주의에 대해 반대하는 경향을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사랑하라는 명령은 믿음을 포함하기 위해서 다시 조직적으로 말해진다. 믿음의 온전화(딛 1:13; 딛 2:2)는 기독교인의 생활을 모든 거짓 교훈들로부터 구별하는 새로운 기준을 제시한다. 철학과 지혜에 대한 부대적 의미는 스스로를 강화하고 있는 교회의 자각을 강하게 하는 것이다.
이 외의 전면 전승에 나오는 바와 같이 야고보도 믿음을 증명할 필요를 자각한다(약 1:3;참조: 벧전 1:7). 그는 살아 있는 믿음과 신앙 고백에 모순되는 모든 행위의 중지를 요구한다(약 1:6 이하). 그에게 있어서 믿음과 순종의 행위는 불가분리적으로 연결된 것이다. 단지 신뢰와 신앙 고백으로 이해되는 믿음은 구원할 수 없는 것이다. 오직 순종과 하나님의 계명들을 완수하는 행위를 통해서만 믿음은 완성에 이른다(약 2:22). 야고보가 심중에 반대하는 것은 믿음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지 않는 자이다.
(편집자주-어떤 학자들은 야고보의 가르침이 특히 칭의 Justification에 있어서 바울의 가르침과 모순된다고 주장한다. 야고보는 바울의 이신칭의 Justification by faith 교리를 문맥 그대로 받아들인 자들이, 행위를 칭의의 근거로 삼기를 거절하는 바울의 가르침은 선행과 변화된 삶에 대한 필요성의 제거를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하여 대답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리하여 이들은 롬 4:3과 갈 3:6[창 15:6]은 취하고 롬 6:1 이하; 롬 12:1 이하; 갈 5:15-26은 무시하였을 것이다. 역시 약 2:23에서 창 15:6을 인용한 것은 인상적이다. 곧 야고보도 아브라함의 모범을 언급함으로 자신의 주장을 예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창세기 15장에 나오는 칭의 판정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아브라함의 믿음에 호소하는 반면에 야고보는 이삭을 제단에 드리기를 서슴치 않는 아브라함의 의향을 나타내는 창세기 22장의 기사에 호소한다. 약 2:22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같이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바울과 야고보 모두에게 있어서 "의롭다함" Justify은 의롭다고 선포하는 것 declare righteous을 의미한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바울의 경우 신자를 의롭다고 선포하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야고보의 경우에 그를 의롭다고 선포하는 것은 그가 믿음의 사람임을 증명하는 행위인 것이다. 왜냐하면 야고보가 주장하고자 하는 명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 이라"[약 2:17]는 것이기 때문이다)
(e) 믿음의 행위와 구조와 내용.
기독교라는 것은 독특한 믿음 사건(faith event)이다. 믿음과 결부된 사고 형태와 사고 구조들 그리고 관련된 진술들과 기준들(복음, 케리그마,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믿음의 행위는 기독교에서 특별한 의의를 갖는다. 초대 교회 안에 원래 자율적이었고(예: 성령, 또는 지식으로 출발한) 또한 믿음 사건과는 계속 긴장 관계를 유지하였던 다른 사고 형태들이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기독교는 역사적 상황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와 복음의 주장에 비추어 기독교적 관점을 가장 강력하게 표현하였기 때문에 하나의 믿음사건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믿음이 말해야 할 바를 선포할 수 있는 것은 복음과 하나님의 말씀의 주장들에 관해서만 가능하다. 기독교인은 자신이 은혜를 받았다는 것과 목적지를 향해 특별한 행로를 따라 가도록 부르심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은 신자보다 앞선다. 믿음의 근거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다. 믿음은 지식에 종속하지만 그러나 지식은 믿음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다.
O.Michel.]
(8) 온유와
prau?th"(4240, 프라위테스)
온유, 친절, 겸손, 동정심.
1. 일반 헬라어의 용법
프라위테스는 프라위스(prau?", 4239)에서 파생되어 투키디데스(Thucydides) 시대부터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온유, 온화, 친절'을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프라위테스는 70인역본에서 11회 나오며, 히브리어 아나와 안와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에 3:13에서 아하수에로 왕은 자기가 온유하게 처신하기로 작정했다고 한다. 에 5:1에서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왕의 마음을 온유하게 변화시켰다고 한다. 시 45:4에서 왕과 관련하여 나온다: "왕은 진리와 온유와 공의를 위하여". 시 90:10; 시132:1에는 '고생'이란 의미로 나타난다. 집회서 1:17; 4:8; 10:28에서 '유순, 온유, 겸손'이란 의미를 나타낸다.
3. 신약성경의 용법
프라위테스는 신약성경에서 7회 나온다. 신약성경이 프라위테스를 주장할 때, 그것은 순전히 인간의 의지에 따라 좌우되는 태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구원의 징표이다. 즉 그것은 '부름'(엡 4:2)과 선택(골 3:12)의 표식이며 성령의 역사(갈 5:23)이다. 그것은 헬라적 의미에서의 미덕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하여 주어진 생활과 행위의 가능성이다. 그것은 인간의 한 기질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그리스도와 연결되고 그의 형상과 일치될 때에 생겨나는 것이다.
고후 10:1에서 바울은 프라위테스와 에피에이케이아(ejpieivkeia, 1932)를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동안 사람에게 보여주셨던 태도의 특징으로 언급하면서, 그것을 본받아야 할 모범으로 교회에 제시한다: "너희를 대하여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프라위테스는 또한 죄를 범한 기독교인을 처리하는 일에 있어서 가져야할 태도에 관해서 언급된다(고전 4:21; 갈 6:1; 딤후 2:25).
약 1:20과 약 1:21에서 프라위테스는 올게(ojrghv, 3709:성내는 것)와 대조되어 있으며, 선생에 대하여 분노를 터뜨리는 것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려는 온유하고 겸손한 자세를 가리킨다. 온유는 신적 지혜로 영감된 참된 의인의 표식이다: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약 3:13). 여기서 온유는 의인의 전 행위에서 나타나며, "독한 시기와 다툼"과 반대된다(약 3:14; 참조: 집회서 3:17; 벧전 3:4).
벧전 3:15에서 당국자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기독교인의 신앙생활의 이유에 대하여 물었을 때 친절하게 온유 겸손히 응해야 한다고 한다. 비록 그들의 부당한 대우가 분개와 반항하도록 자극할지라도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 적대와 박해의 상황과 관련하여 언급한 것이다.
(참조: F.Hauck/S.Schulz; W.Bauder).
→ 4239b 프라위스
(9) 절제이다.
ejgkravteia(1466, 엥크라테이아)
자제 self-control.
명사 엥크라테이아(Xen., Pla. 이래)는 엥크라테스(ejgkrathv", 1468: 강한, 지배하는, 억누르는, 자제하는)에서 유래했으며, '확고성'과 '자제'라는 어감을 지닌, 자신이나 어떤 것에 대한 '지배권'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성적 문제에 관련된 억제, 참을성, 견실이란 의미의 자제(self-control)도 의미한다.
소크라테스는 엥크라테이아를 윤리학에서 중요한 덕목의 하나로 처음으로 소개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도 이 개념을 채용했다. 플라톤에 있어서 엥크라테이아는 감각적 충동에 대한 통제력을 의미한다.
스토아 학파에서는 엥크라테이아가 인간 자유의 표시로써 간주되었다. 충동, 특히 성적 충동과 음식과 음주의 향락을 삼가는 것은 참된 인간이 되는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부분이다.
신-피타고라스 학파는 이원론적인 체계를 발전시켰는데 그들에 따르면, 육체는 영혼이 신에게 갈 수 있도록 금욕을 통하여 억제되어야 한다고 했다. 금욕주의는 고대 세계에서 사람들을 제의적인 예배에 적응하도록 함으로써 큰 역할을 하였다. 필로(Philo)는 엥크라테이아를 충동과 열정을 초월하는 덕이라고 격찬하였다(Spec. Leg.).
예수님 당시의 에세네파 사람들(Essenes)은 독신을 권장하였고, 여러가지 다른 방법으로 금욕하며 살았는데, 예를 들면 소유와 음식에 대한 금욕과 철야 등이다(Josephus, War).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엥크라테이아는 70인역본에서 외경에서 3회 나오며, '억제'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집회서 18:30; 8:21; 마카베오사서 5:34).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엥크라테이아는 신약성경에서 4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행 24:25,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바울은 행 24:24 이하에서 첫째로 '그리스도 안에 믿음'에 대하여 그 다음에 의와 '절제'에 대하여 말한다. 이 말씀에서 "절제"는 아마 불의 (간통)의 결과인 지방 행정 장관 벨릭스의 결혼을 암시하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누가가 사도행전에서 계속 언급하고 있는 금욕주의적 경향을 표현하는 것일 수도 있다(참조: 행 2:44 이하; 행 4:32).
(b) 갈 5: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바울은 엥크라테이아를 "성령의 열매"로 묘사한다. 여기에서 자제 혹은 절제는 분명히 간음(포르네이아), 불순, 방탕, 우상숭배(갈 5:19)에 반대되는 긍정적인 행동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대로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는 수단인 엥크라테이아는 결코 우리들의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우리들이 복음에 의탁함으로써 성령의 선물로 새로이 받아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여기의 엥크라테이아가 단지 성적 측면에만 관련되느냐 혹은 더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느냐에 있다. 그러나 우리가 파악해야할 것은 바울이 성적 금욕주의에 높은 평가를 내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적 금욕주의가 결코 이원론적으로 고정되지 않고(위의 고전 문헌) 본유적 가치도 얻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c) 벧후 1: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여기서 절제는 지식의 사용에 관여한다. 절제란 모든 행사를 적절(법)하게 행하는 내적이며 외적인 자기 조절을 의미한다(E. R. Fuhrman).
여기서 엥크라테이아를 금욕주의적 의미로 이해하면 안된다. 이 용어는 오히려 자신을 제어하는 능력을 지닌다는 본래의 의미로 사용되어 있으나, 그러나 그 능력은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자기 실현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벧후 1:5; 벧후 1:6)으로부터 오는 지식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것은 신자가 곤고를 방지하기 위하여 필요한 인내를 위한 선결 조건이다.(H. Baltensweiler).
5. 믿음의 비밀
(1) 엡 2.8.9
(엡 2:8-9, 바른) [8] 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 [9] 행위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도 자랑치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엡 2:8-9, NKJV) [8] For by grace you have been saved through faith, and that not of yourselves; it is the gift of God, [9] not of works, lest anyone should boast.
(2) 믿음은
(히 11:1-3, 바른)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다. [2] 선진들이 이 믿음으로 증거를 받았다. [3] 믿음으로 우리는 온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으며 보이는 것이 나타나 있는 것으로부터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히 11:1-3, NKJV) [1] Now faith is the substance of things hoped for, the evidence of things not seen. [2] For by it the elders obtained a good testimony. [3] By faith we understand that the worlds were framed by the word of God, so that the things which are seen were not made of things which are visible.
(3) 롬 10.17
(롬 10:17, 바른)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
(Rm 10:17, NKJV) So then faith comes by hearing, and hearing by the word of God.
(4) 벧전 1.23
(벧전 1:23, 바른)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라 썩지 않을 씨로 된 것이니, 곧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된 것이다.
(1Pt 1:23, NKJV) having been born again, not of corruptible seed but incorruptible, through the word of God which lives and abides forever,
(요 6:63, 개역)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Jn 6:63, NKJV) "It is the Spirit who gives life; the flesh profits nothing. The words that I speak to you are spirit, and they are life.
(5) 롬 12:3
(롬 12:3, 바른)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건전한 생각을 하여라.
(Rm 12:3, NKJV) For I say, through the grace given to me, to everyone who is among you, not to think of himself more highly than he ought to think, but to think soberly, as God has dealt to each one a measure of faith.
(6) 빌 4:3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음을 아는 믿음은 내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다.
(빌 4:3, 바른) 참 동역자인 너에게도 부탁하니, 이 여자들을 도와라. 이들은 클레멘트와 나의 다른 동역자들과 함께 복음 안에서 나와 함께 수고하던 자들이다.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
(Php 4:3, NKJV) And I urge you also, true companion, help these women who labored with me in the gospel, with Clement also, and the rest of my fellow workers, whose names are in the Book of Life.
(7) 요 14:12
(요 14:12, 바른)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하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들을 그 자신도 할 것이요, 이보다 더 큰 일들도 할 것이다.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다.
(Jn 14:12, NKJV) "Most assuredly, I say to you, he who believes in Me, the works that I do he will do also; and greater works than these he will do, because I go to My Father.
(8) 막 11:23-24
(막 11:23-24, 바른) [23]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하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번쩍 들려서 바다에 던져져라.' 고 말하고 그의 마음에 의심치 않으며, 그 말한 것이 이루어질 줄로 믿는다면, 그것이 그에게 이루어 질 것이다.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너희가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이루어질 것이다.
(막 11:23-24, NKJV) [23] "For assuredly, I say to you, whoever says to this mountain, 'Be removed and be cast into the sea,' and does not doubt in his heart, but believes that those things he says will be done, he will have whatever he says. [24] "Therefore I say to you, whatever things you ask when you pray, believe that you receive them, and you will have them.
(9) 빌 1:6
(빌 1:6, 바른) 나는 너희 가운데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분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날까지 이루실 것을 확신한다.
(Php 1:6, NKJV) being confident of this very thing, that He who has begun a good work in you will complete it until the day of Jesus Christ;
(10) 엡 1:15-20
(엡 1:15-20, 바른) [15]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님에 대한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들을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16] 나의 기도 가운데 너희를 기억하며, 너희 때문에 감사드리기를 그치지 않는다.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시어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의 마음의 눈을 밝히셔서, 그분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 있는 그분의 유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19] 그분의 강력한 능력의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를 위해 베푸신 그분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무엇인지 너희가 알게 되기를 기도한다. [20]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 능력을 행하시어 그분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신의 오른쪽에 앉히시어,
(엡 1:15-20, NKJV) [15] Therefore I also, after I heard of your faith in the Lord Jesus and your love for all the saints, [16] do not cease to give thanks for you, making mention of you in my prayers: [17] that the God of our Lord Jesus Christ, the Father of glory, may give to you the spirit of wisdom and revelation in the knowledge of Him, [18] the eyes of your understanding being enlightened; that you may know what is the hope of His calling, what are the riches of the glory of His inheritance in the saints, [19] and what is the exceeding greatness of His power toward us who believe, according to the working of His mighty power [20] which He worked in Christ when He raised Him from the dead and seated Him at His right hand in the heavenly places,
(11) 보지 못하고 믿는 자는 복이 있다.
(요 20:27-29, 바른) [27] 그때에 예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아라. 또한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어라." 하시니, [28] 도마가 예수께 대답하기를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하고 말하였다. [29]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나를 보았으므로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은 자들은 복되다." 라고 하셨다.
(요 20:27-29, NKJV) [27] Then He said to Thomas, "Reach your finger here, and look at My hands; and reach your hand here, and put it into My side. Do not be unbelieving, but believing." [28] And Thomas answered and said to Him, "My Lord and my God!" [29] Jesus said to him, "Thomas, because you have seen Me, you have believed. Blessed are those who have not seen and yet have believed."
(12) 경건과 신령한 보든 복을
(엡 1:3-6, 바른)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양하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영적인 복으로 우리에게 복을 주신 분이시다. [4] 그분께서 창세전에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분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셨으며, [5] 그분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우리를 예정하시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분의 아들로 받아들였으니, [6] 이는 그분의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그분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다.
(엡 1:3-6, NKJV) [3] Blessed be the God and Father of our Lord Jesus Christ, who has blessed us with every spiritual blessing in the heavenly places in Christ, [4] just as He chose us in Him before the foundation of the world, that we should be holy and without blame before Him in love, [5] having predestined us to adoption as sons by Jesus Christ to Himself, according to the good pleasure of His will, [6] to the praise of the glory of His grace, by which He has made us accepted in the Beloved.
(13) 요 3:6 내 믿음이 아니라 성령으로 주신 믿음이다.
(요 3:6, 바른)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다.
(Jn 3:6, NKJV) "That which is born of the flesh is flesh, and that which is born of the Spirit is spirit.
(14) 동일한 보배로운 믿음
(벧후 1:1-2, 바른) [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우리와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를 쓴다. [2]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님을 아는 것으로 너희에게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을지어다.
(벧후 1:1-2, NKJV) [1] Simon Peter, a bondservant and apostle of Jesus Christ, To those who have obtained like precious faith with us by the righteousness of our God and Savior Jesus Christ: [2] Grace and peace be multiplied to you in the knowledge of God and of Jesus our Lord,
(15) 십자가와 부활을 믿음
(롬 10:9-10, 바른)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또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에 이른다.
(롬 10:9-10, NKJV) [9] that if you confess with your mouth the Lord Jesus and believe in your heart that God has raised Him from the dead, you will be saved. [10] For with the heart one believes unto righteousness, and with the mouth confession is made unto salvation.
(16) 영원한 속죄
(히 10:15-20, 바른) [15] 성령께서도 우리에게 먼저 말씀하셨다. [16]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날후로 내가 그들과 세울 언약이 이것이다. 내가 나의 율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것을 그들의 생각에 새겨 주겠다.' 하시고, [17] '또 내가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더 이상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 하셨다. [18] 이처럼 죄와 불법이 사해졌으니, 죄를 위한 제물이 더 이상 필요 없다.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예수님의 피로 지성소에 들어갈 담대함을 우리는 가지고있다. [20] 그 길은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휘장을 통해 열어 주신 새롭고 살아 있는 길이니, 이 휘장은 곧 그분의 육체이다.
(히 10:15-20, NKJV) [15] But the Holy Spirit also witnesses to us; for after He had said before, [16] "This is the covenant that I will make with them after those days, says the LORD: I will put My laws into their hearts, and in their minds I will write them," [17] then He adds, "Their sins and their lawless deeds I will remember no more." [18] Now where there is remission of these, there is no longer an offering for sin. [19] Therefore, brethren, having boldness to enter the Holiest by the blood of Jesus, [20] by a new and living way which He consecrated for us, through the veil, that is, His flesh,
(17) 천국과 지옥을 믿음
(계 20:11-15, 바른) [11] 또 내가 희고 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분을 보았는데, 땅과 하늘이 그분의 얼굴 앞에서 사라지고 그 자리마저 찾아볼 수 없었다. [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져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져 있으니, 곧 생명책이다. 죽은 자들이 자기들의 행위에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았다. [13] 또 바다가 그 안에 있는 죽은 자들을 내어 주고,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니, 각 사람이 그들의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고, [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이 둘째 사망, 곧 불못이다. [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자는 불못에 던져졌다.
(계 20:11-15, NKJV) [11] Then I saw a great white throne and Him who sat on it, from whose face the earth and the heaven fled away. And there was found no place for them. [12] And I saw the dead, small and great, standing before God, and books were opened. And another book was opened, which is the Book of Life. And the dead were judged according to their works, by the things which were written in the books. [13] The sea gave up the dead who were in it, and Death and Hades delivered up the dead who were in them. And they were judged, each one according to his works. [14] Then Death and Hades were cast into the lake of fire. This is the second death. [15] And anyone not found written in the Book of Life was cast into the lake of fire.
(18)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
(살후 3:1-2, 바른) [1] 마지막으로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주님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속히 전파되어 영광스럽게 되고, [2] 또한 우리가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구출되게 하소서." 하여라. 믿음은 모든 사람들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살후 3:1-2, NKJV) [1] Finally, brethren, pray for us, that the word of the Lord may run swiftly and be glorified, just as it is with you, [2] and that we may be delivered from unreasonable and wicked men; for not all have faith.
(19) 롬 14:17
(롬 14:17, 바른)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고,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기쁨이다.
(Rm 14:17, NKJV) for the kingdom of God is not eating and drinking, but righteousness and peace and joy in the Holy Spirit.
(20) 믿음으로 살아야
(고후 5:5-7, 바른) [5]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그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6]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머물러 살고 있는 동안에는 주께로부터 떠나 있다는 것을 안다.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후 5:5-7, NKJV) [5] Now He who has prepared us for this very thing is God, who also has given us the Spirit as a guarantee. [6] So we are always confident, knowing that while we are at home in the body we are absent from the Lord. [7] For we walk by faith, not by sight.
(21) 예수께로서 난 믿음(행 3)
(행 3:11-16, 개역) [11]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 [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13]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저를 넘겨 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안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 [14]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주기를 구하여 [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행 3:11-16, NKJV) [11] Now as the lame man who was healed held on to Peter and John, all the people ran together to them in the porch which is called Solomon's, greatly amazed. [12] So when Peter saw it, he responded to the people: "Men of Israel, why do you marvel at this? Or why look so intently at us, as though by our own power or godliness we had made this man walk? [13] "The God of Abraham, Isaac, and Jacob, the God of our fathers, glorified His Servant Jesus, whom you delivered up and denied in the presence of Pilate, when he was determined to let Him go. [14] "But you denied the Holy One and the Just, and asked for a murderer to be granted to you, [15] "and killed the Prince of life, whom God raised from the dead, of which we are witnesses. [16] "And His name, through faith in His name, has made this man strong, whom you see and know. Yes, the faith which comes through Him has given him this perfect soundness in the presence of you all.
(22) 믿고 기도한 것은 받은줄로 여기라
(막 11:23-24, 개역) [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막 11:23-24, NKJV) [23] "For assuredly, I say to you, whoever says to this mountain, 'Be removed and be cast into the sea,' and does not doubt in his heart, but believes that those things he says will be done, he will have whatever he says. [24] "Therefore I say to you, whatever things you ask when you pray, believe that you receive them, and you will have them.
(23) 거짓없는 믿음
(딤후 1:5, 개역)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2Tm 1:5, NKJV) when I call to remembrance the genuine faith that is in you, which dwelt first in your grandmother Lois and your mother Eunice, and I am persuaded is in you also.
(24) 믿음을 시험하라
(고후 13:3-5, 개역) [3]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함이니 저가 너희를 향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 [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고후 13:3-5, NKJV) [3] since you seek a proof of Christ speaking in me, who is not weak toward you, but mighty in you. [4] For though He was crucified in weakness, yet He lives by the power of God. For we also are weak in Him, but we shall live with Him by the power of God toward you. [5] Examine yourselves as to whether you are in the faith. Test yourselves. Do you not know yourselves, that Jesus Christ is in you?--unless indeed you are disqualified.
(25) 단번에 주신 믿음
(유 1:3, 개역)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Jd 1:3, NKJV) Beloved, while I was very diligent to write to you concerning our common salvation, I found it necessary to write to you exhorting you to contend earnestly for the faith which was once for all delivered to the saints.
6. 빼앗을수 없음
(1) 요 10.28ㅡ29
(요 10:28-29, 바른) [2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니, 그들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이며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을 것이다. [29] 그들을 내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만물보다 더 크시니, 아무도 아버지의 손에서 그것을 빼앗을 수 없다.
(요 10:28-29, NKJV) [28] "And I give them eternal life, and they shall never perish; neither shall anyone snatch them out of My hand. [29] "My Father, who has given them to Me, is greater than all; and no one is able to snatch them out of My Father's hand.
(2) 롬 8.38ㅡ39
(롬 8:38-39, 바른) [38] 나는 확신한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력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을 것이다.
(롬 8:38-39, NKJV) [38] For I am persuaded that neither death nor life, nor angels nor principalities nor powers, nor things present nor things to come, [39] nor height nor depth, nor any other created thing, shall be able to separate us from the love of God which is in Christ Jesus our Lord.
(3) 만지지도 못함
(요일 5:18, 바른) 하나님께로부터 난자마다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분이 그를 지키시므로 악한 자가 그를 손대지도 못한다.
(1Jn 5:18, NKJV) We know that whoever is born of God does not sin; but he who has been born of God keeps himself, and the wicked one does not touch him.
(4) 정죄없음
(롬 8:1-2, 바른)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2] 이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기 때문이다.
(롬 8:1-2, NKJV) [1] There is therefore now no condemnation to those who are in Christ Jesus, who do not walk according to the flesh, but according to the Spirit. [2] For the law of the Spirit of life in Christ Jesus has made me free from the law of sin and death.
(5) 하나님의 소유
(롬 14:7-8, 바른) [7] 우리 중에 아무도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으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것이다.
(롬 14:7-8, NKJV) [7] For none of us lives to himself, and no one dies to himself. [8] For if we live, we live to the Lord; and if we die, we die to the Lord. Therefore, whether we live or die, we are the Lord's.
(6) 성령의 전
(고전 3:16, 바른)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께서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1Co 3:16, NKJV) Do you not know that you are the temple of God and that the Spirit of God dwells in you?
(고전 6:19-20, 바른) [19] 너희의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너희 안에 모시고 있는 성령의 전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다. [20]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고 너희를 사셨으니, 너희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
(고전 6:19-20, NKJV) [19] Or do you not know that your body is the temple of the Holy Spirit who is in you, whom you have from God, and you are not your own? [20] For you were bought at a price; therefore glorify God in your body and in your spirit, which are God's.
(2Co 1:22, NKJV) who also has sealed us and given us the Spirit in our hearts as a guarantee.
(8) 인치심
(엡 1:13-14, 바른) [13]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또한 그 안에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 [14] 이 성령이 우리 유업의 보증이 되시니, 이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의 구속을 위한 것이며, 또한 그분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다.
(엡 1:13-14, NKJV) [13] In Him you also trusted, after you heard the word of truth, the gospel of your salvation; in whom also, having believed, you were sealed with the Holy Spirit of promise, [14] who is the guarantee of our inheritance until the redemption of the purchased possession, to the praise of His glory.
(9) 아바아버지
(롬 8:15, 바른) 너희는 다시 두려움에 이르게 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그 영으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 짖는다.
(Rm 8:15, NKJV) For you did not receive the spirit of bondage again to fear, but you received the Spirit of adoption by whom we cry out, "Abba, Father."
(갈 4:6, 바른) 그런데 너희는 아들들이므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영을 우리의 마음 속에 보내셔서 '아바 아버지' 라 부르게 하셨다.
(Gl 4:6, NKJV) And because you are sons, God has sent forth the Spirit of His Son into your hearts, crying out, "Abba, Father!"
(10) 이전 것은 지나갔다.
(고후 5:17, 바른)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아라, 새 것이 되었다.
(2Co 5:17, NKJV) Therefore, if anyone is in Christ, he is a new creation; old things have passed away; behold, all things have become new.
(11)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았다.
(엡 4:22-24, 바른) [22] 너희가 거짓된 욕망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라 사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23] 너희 마음에 영으로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진리의 의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어라.
(엡 4:22-24, NKJV) [22] that you put off, concerning your former conduct, the old man which grows corrupt according to the deceitful lusts, [23] and be renewed in the spirit of your mind, [24] and that you put on the new man which was created according to God, in true righteousness and holiness.
(12) 사망에서 생명으로
(요 5:24, 바른) 내가 진정으로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의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자는 영생을 가지고 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니, 그는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기 때문이다.
(Jn 5:24, NKJV) "Most assuredly, I say to you, he who hears My word and believes in Him who sent Me has everlasting life, and shall not come into judgment, but has passed from death into life.
(13) 하나님의 자녀
(요일 3:10, 바른) 이것으로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드러나게 된다. 의를 행하지 않는 자나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누구나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다.
(1Jn 3:10, NKJV) In this the children of God and the children of the devil are manifest: Whoever does not practice righteousness is not of God, nor is he who does not love his brother.
(14) 살려주는 영
(고전 15:45, 개역)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1Co 15:45, NKJV) And so it is written, "The first man Adam became a living being." The last Adam became a life-giving spirit.
7. 성전임을 알자
(1) 보혈
(벧전 1:18-19, 바른) [18] 너희가 아는 것처럼 조상들이 전한 헛된 생활 방식에서 너희가 구속받은 것은 은이나 금같이 썩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라, [19] 오직 흠 없고 티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것이다.
(벧전 1:18-19, NKJV) [18] knowing that you were not redeemed with corruptible things, like silver or gold, from your aimless conduct received by tradition from your fathers, [19] but with the precious blood of Christ, as of a lamb without blemish and without spot.
(2) 성령님
(요 14:16, 바른) 내가 아버지께 간구하면, 아버지께서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셔서 영원히 너희와 함께 계시게 하실 것이다.
(Jn 14:16, NKJV) "And I will pray the Father, and He will give you another Helper, that He may abide with you forever--
(고후 13:13, 바른)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모두와 함께 있을지어다.
(2Co 13:13, NKJV) All the saints greet you.
(마 3:16-17, 바른) [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시자, 바로 그때에 하늘이 그분께 열리고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같이 내려와 자기 위에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17] 바로 그때 하늘에서 음성이 있어 말씀하시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기뻐한다." 라고 하셨다.
(마 3:16-17, NKJV) [16] When He had been baptized, Jesus came up immediately from the water; and behold, the heavens were opened to Him, and He saw the Spirit of God descending like a dove and alighting upon Him. [17] And suddenly a voice came from heaven, saying, "This is My beloved Son, in whom I am well pleased."
(3) 말씀
(딤후 3:16-17, 바른)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위하여 준비되게 하려는 것이다.
(딤후 3:16-17, NKJV) [16] All Scripture is given by inspiration of God, and is profitable for doctrine, for reproof, for correction, for instruction in righteousness, [17] that the man of God may be complete, thoroughly equipped for every good work.
(시 1:1-3, 바른) [1] {제일권}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계획을 따르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기뻐하며 그분의 율법을 밤낮으로 묵상한다. [3] 그는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와 같아 제때에 열매를 맺으며, 그 잎이 시들지 않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할 것이다.
(시 1:1-3, NKJV) [1] Blessed is the man Who walks not in the counsel of the ungodly, Nor stands in the path of sinners, Nor sits in the seat of the scornful; [2] But his delight is in the law of the LORD, And in His law he meditates day and night. [3] He shall be like a tree Planted by the rivers of water, That brings forth its fruit in its season, Whose leaf also shall not wither; And whatever he does shall prosper.
(4) 기도
(계 8:3-5, 바른) [3] 또 다른 천사가 와서 금 향로를 들고 제단 앞에 섰는데,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함께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리도록 그 천사에게 많은 향이 주어졌다. [4] 그 향의 연기가 성도들의 기도와 함께 그 천사의 손에서 하나님 앞으로 올라갔다. [5] 그 천사가 향로를 취하여 제단의 불에서 불을 가득 채워 땅에 쏟으니, 천둥과 요란한 소리와 번개와 지진이 일어났다.
(계 8:3-5, NKJV) [3] Then another angel, having a golden censer, came and stood at the altar. He was given much incense, that he should offer it with the prayers of all the saints upon the golden altar which was before the throne. [4] And the smoke of the incense, with the prayers of the saints, ascended before God from the angel's hand. [5] Then the angel took the censer, filled it with fire from the altar, and threw it to the earth. And there were noises, thunderings, lightnings, and an earthquake.
(출 30:27-28, 바른) [27] 상과 그 모든 기구와 등대와 그 기구들과 분향단과, [28] 번제단과 그 모든 기구들과, 물두멍과 그것의 받침대에 발라서,
(출 30:27-28, NKJV) [27] "the table and all its utensils, the lampstand and its utensils, and the altar of incense; [28] "the altar of burnt offering with all its utensils, and the laver and its base.
(5) 믿음
(히 10:21-25, 바른) [21] 또 우리는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위대한 제사장을 모시고 있다. [22] 우리가 양심의 악을 깨닫고 마음을 깨끗이 씻고 맑은 물로 몸을 씻었으니, 참된 마음과 확신에 찬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23] 약속하신 분은 신실하시니, 우리가 소망의 신앙고백을 흔들림 없이 붙잡자. [24] 또한 사랑과 선한 일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서로를 보살피자. [25] 어떤 이들의 습관처럼 모이기를 폐하지 말고, 오히려 열심히 모이도록 서로 권하며 그 날이 가까워짐을 볼수록 더욱 그렇게 하자.
(히 10:21-25, NKJV) [21] and having a High Priest over the house of God, [22] let us draw near with a true heart in full assurance of faith, having our hearts sprinkled from an evil conscience and our bodies washed with pure water. [23] Let us hold fast the confession of our hope without wavering, for He who promised is faithful. [24] And let us consider one another in order to stir up love and good works, [25] not forsaking the assembling of ourselves together, as is the manner of some, but exhorting one another, and so much the more as you see the Day approaching.
(6) 생각 롬 8
(롬 8:5-8, 바른) [5] 육체를 따라 사는 자는 육체의 일을 생각하나, 성령을 따라 사는 자는 성령의 일을 생각한다. [6] 육체의 생각은 사망이나, 성령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다. [7] 육체의 생각은 하나님께 원수가 되니, 그것은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지 않을 뿐 아니라 복종할 수도 없다. [8] 육체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롬 8:5-8, NKJV) [5] For those who live according to the flesh set their minds on the things of the flesh, but those who live according to the Spirit, the things of the Spirit. [6] For to be carnally minded is death, but to be spiritually minded is life and peace. [7] Because the carnal mind is enmity against God; for it is not subject to the law of God, nor indeed can be. [8] So then, those who are in the flesh cannot please God.
(7) 십자가
(갈 3:1, 바른) 오,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의 눈앞에 밝히 드러나 있는데 누가 너희를 미혹하였느냐?
(Gl 3:1, NKJV) O foolish Galatians! Who has bewitched you that you should not obey the truth, before whose eyes Jesus Christ was clearly portrayed among you as crucified?
(고전 1:18-21, 바른)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당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나,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19] 기록되어 있기를 "내가 지혜로운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겠다." 라고 하였다. [20] 지혜로운 자가 어디 있느냐? 학자가 어디 있느냐? 이 시대의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만드신 것이 아니냐?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세상이 자기 지혜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선포의 어리석은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셨다.
(고전 1:18-21, NKJV) [18] For the message of the cross is foolishness to those who are perishing, but to us who are being saved it is the power of God. [19] For it is written: "I will destroy the wisdom of the wise, And bring to nothing the understanding of the prudent." [20] Where is the wise? Where is the scribe? Where is the disputer of this age? Has not God made foolish the wisdom of this world? [21] For since, in the wisdom of God, the world through wisdom did not know God, it pleased God through the foolishness of the message preached to save those who believe.
(고전 2:1-3, 바른)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가서 하나님의 비밀을 전할 때, 말과 지혜의 훌륭한 것으로 하지 않았다. [2] 나는 너희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다. [3] 내가 너희에게 갔을 때, 나는 약하였고 두려워하였으며 몹시 떨었다.
(고전 2:1-3, NKJV) [1] And I, brethren, when I came to you, did not come with excellence of speech or of wisdom declaring to you the testimony of God. [2] For I determined not to know anything among you except Jesus Christ and Him crucified. [3] I was with you in weakness, in fear, and in much trembling.
(8)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요 4:22-24, 바른)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지만, 우리는 아는 분께 예배하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들에게서 나기 때문이다. [23] 그러나 참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오는데, 지금이 그 때이다.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 [24]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그분께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
(요 4:22-24, NKJV) [22] 'You worship what you do not know; we know what we worship, for salvation is of the Jews. [23] 'But the hour is coming, and now is, when the true worshipers will worship the Father in spirit and truth; for the Father is seeking such to worship Him. [24] 'God is Spirit, and those who worship Him must worship in spirit and truth."
(9) 인격이 주님을 닮아감
(롬 8:29, 바른)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들을,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또한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 아들이 많은 형제 가운데 맏아들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다.
(Rm 8:29, NKJV) For whom He foreknew, He also predestined to be conformed to the image of His Son, that He might be the firstborn among many brethren.
(엡 4:13, 바른) 우리는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온전한 자가 되어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Eph 4:13, NKJV) till we all come to the unity of the faith and of the knowledge of the Son of God, to a perfect man, to the measure of the stature of the fullness of Christ;
(10) 벧후 1
(벧후 1:3-11, 바른) [3] 그분의 신성의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신의 영광과 덕으로 우리를 부르신 분을 아는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4] 이로써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들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너희가 이것들로 말미암아 세상에서 정욕으로 인하여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다. [5] 그러므로 너희는 더욱 힘써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여라. [8] 이런 것들이 너희에게 있고 또 풍성하면,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데 게으르거나 열매 없는 자들이 되지 않을 것이다. [9] 그러나 이런 것들이 없는 사람은 맹인이어서 멀리 보지 못하며 자기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은 자이다. [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여라. 너희가 이런 것들을 행하면 결코 넘어지지않을 것이다. [11] 이렇게 하면 우리 주님,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너희에게 넉넉히 주어질 것이다.
(벧후 1:3-11, NKJV) [3] as His divine power has given to us all things that pertain to life and godliness, through the knowledge of Him who called us by glory and virtue, [4] by which have been given to us exceedingly great and precious promises, that through these you may be partakers of the divine nature, having escaped the corruption that is in the world through lust. [5] But also for this very reason, giving all diligence, add to your faith virtue, to virtue knowledge, [6] to knowledge self-control, to self-control perseverance, to perseverance godliness, [7] to godliness brotherly kindness, and to brotherly kindness love. [8] For if these things are yours and abound, you will be neither barren nor unfruitful in the knowledge of our Lord Jesus Christ. [9] For he who lacks these things is shortsighted, even to blindness, and has forgotten that he was cleansed from his old sins. [10] Therefore, brethren, be even more diligent to make your call and election sure, for if you do these things you will never stumble; [11] for so an entrance will be supplied to you abundantly into the everlasting kingdom of our Lord and Savior Jesus Christ.